코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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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ardoms : Total War 로마 제국 프리뷰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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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모드를 만들고 있는 Tsardoms 팀과 괴상한 그리스어들을 읽어준 구글 번역기에게 모든 공을 돌립니다.


세력 개관


 발칸 반도의 남쪽 끝, 그곳에는 그 누구보다도 오래된 나라가 하나 있다. 이 나라는 마치 세월의 흐름을 느끼지 않는 듯, 혹은 신의 가호를 받는 듯 굳건히 버티며 수많은 세력들의 흥망성쇠를 지켜봐 왔다. 이 나라는 수많은 시대, 종교, 민족들이 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와중에도 과거와의 연속성을 잃지 않았다. 1천 년을 넘게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에 세워져 암흑 시대와 중세 시대를 모두 겪어온 "로마인들의 제국"은 이제 유럽 르네상스의 태동기에 살짝 발을 걸치려 하고 있다.


 오늘날 로마 제국의 강역은 북으로는 로도페 산맥, 남으로는 베네치아령 크레타 섬과 마주보는 에게 해 해안에 이르며 동으로는 소아시아, 서로는 아드리아 해 해안에 이른다. 다만 애석하게도 이 땅들은 예전과 같이 통합되어 있지 않다. 라틴인들이 4차 십자군 원정에서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점령하고 "로마니아의 제국"을 세웠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수많은 세력들이 영토를 산산이 쪼개 놓고 끝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예컨대 성채, 탑, 요새로 가득찬 모레아 반도의 산악지대에서는 로마인들, 앙주 가문 세력들, 베네치아인들, 프랑크인들, 카탈루냐인들이 누구 할 것 없이 크고 작은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버티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그래도 상황이 점차 나아지고 있었다. 로마인들이 점점 점령지를 넓혀 가면서, 150년 전에 잃어버린 땅들을 모두 수복하고 통합된 로마 제국을 재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상황이 크게 변했다. 현재 제국은 사회, 종교, 정부의 전 영역에 걸친 심각한 내전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이 틈을 타 이웃 나라들도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해 달려들고 있다.



역사적 배경


 1204년 콘스탄티누폴리스 약탈 이래로 로마 제국은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채 끝없는 몰락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였다. 1261년 제국군이 수도를 탈환한 뒤 약 1세기 동안 대부분의 유럽 영토를 수복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14세기 초 제국 국력의 핵심이었던 소아시아는 버려지고 빼앗겼다. 우리가 다룰 시대에 소아시아에서 제국이 가진 것은 몇 개의 해안 도시 뿐이다. 나머지는 수많은 튀르크인 베이와 에미르들이 차지했고, 로마인들은 도시를 하나하나 빼앗길 때마다 인적자원을 잃는 동시에 수많은 이주민 떼거리를 떠안아야 했다.


 유럽에서는 그나마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제국의 국내 질서는 귀족들 사이의 내분, 에노티키(Enotikoi/로마 교황과의 통합을 바라는 분파)와 안쎄노티키(Anthenotikoi/그 반대파)의 대립, 상류 계급과 하류 계급의 갈등, 헤지카즘 등 종교적인 문제를 둘러싼 수도사들 사이의 분쟁으로 휘청거렸다. 우리가 다룰 시대의 "바실리아 톤 로메온"에는 이처럼 국가를 약화시킬 위험이 있는 수많은 사회적 갈등이 산적해 있는 상태이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1341년에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 황제가 45세의 나이로 서거했고, 그의 아들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는 너무 어렸다. 선제의 친우이자 제국군 총사령관(Megas Domestikos)이었으며, 선제가 살아 있었을 때에는 한사코 공동황제로 즉위하는 것을 거부했던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어린 황제의 섭정으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몇 달 후, 칸타쿠지노스를 믿지 못했던 황태후 사보이의 안나, 세계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 칼레카스, 총리(Mesazon) 겸 해군 총사령관(Megas Doux) 알렉시오스 아포카브코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어린 황제를 장악했다. 칸타쿠지노스는 가족과 몇몇 귀족들과 함께 디디모티콘으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군대는 이에 반발하여 칸타쿠지노스를 공동황제로 추대하고, 새로 편성된 섭정 정부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섭정 정부 측의 군대가 우세하여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의 도시 대부분을 점령하고, 총사령관의 거점인 디디모티콘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쎄살로니키의 열심당(Zealots)의 예에서 드러나듯이, 어린 황제와 섭정 정부를 지지하는 제국 하층민들로부터 공격당한 많은 귀족들이 칸타쿠지노스 편에 가담했다. 이에 더해 칸타쿠지노스는 헤지카스트 운동의 지도자였던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기 때문에 갈등의 불씨는 종교계에도 튀었다.


 칸타쿠지노스는 기존의 동맹군이던 세르비아 왕 스테판 두샨과 불가리아의 짜르가 자신을 배신하고 섭정 정부 측에 붙자 그의 친구인 아이든 공국의 우무르와 오스만 공국의 오르한을 끌어들였다. 동방 세력의 지원을 받은 받아 상황을 반전시킨 칸타쿠지노스는 제국 제 2의 도시 쎄살로니키를 포위하고, 아드리아누폴리스를 포함해 트라키아 각지의 도시를 해방시켰다. 이제 상황은 섭정 정부 측에 불리하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트키아의 몇몇 해안 도시들과 섬들, 그리고 콘스탄티누폴리스 뿐이다. 그러나 칸타쿠지노스와 섭정 정부 중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만 할 것이다.



현재 상황


 지중해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제국은 지금까지 수많은 정복자들의 탐나는 목표가 되어 왔다. 제국의 북쪽에는 로마인들의 오랜 적들 중 하나인 불가리아 제국이 있다. 불가리아의 짜르 이반 알렉산더는 상당히 영민한 군주로써, 영토 획득을 위해 칸타쿠지노스와 섭정 정부 어느 쪽과도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다.  북서쪽의 세르비아를 다스리는 교활한 왕 스테판 두샨은 로마 황제가 되겠다는 원대한 야망을 품고 있으며, 발칸 지역 전체를 지배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거리낌없이 저지를 것이다. 서쪽의 시칠리아를 다스리는 앙주 가문은 그리스 서부 해안에 영지를 가지고 있으며, 로베르토 기스카르가 수 세기 전에 제국에 벌였던 짓을 재연하고 싶어한다.


 남쪽에는 라틴 제국의 잔당들이 펼쳐져 있다. 아케아 공국, 시칠리아의 앙주 가문, 최근 카탈루냐 용병단에게 점령된 아씨네 공국을 포함해 기타 수많은 영주들과 귀족들이 로마 제국의 통합을 방해하고 있다. 에게 해에서는 해양 공화국인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섬들의 귀중한 무역 거점들과 동방 무역로를 독점하기 위해 싸우고 있으며, 제국이 에게 해 북부에 가진 몇 안 되는 섬 거점들을 빼앗는 데에도 혈안이 되어 있다. 이에 더해 성 요한 기사단도 에게 해의 쟁패에 가세하여, 남쪽의 도데카네스 제도를 점령하고 동방의 이교도들을 공격하고 있다.


 그 동방에서는 여러 튀르크 베이들이 지역 권력의 공백을 틈타 독자적인 국가들을 세워 놓고 있다. 그들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오스만, 아이든, 카라만 공국(Principalities; Beyliks)으로서 영토, 군대, 영향력 면에서 다른 공국들을 압도하고 있다. 이들의 확장에 잘 대처하지 못한다면, 정복지가 부족한 그들은 로마인들의 남은 영토를 노리기 시작할 것이다. 소아시아의 해안 도시들, 혹은 그 너머의 섬들이나 유럽 지역까지도.


 이 세력들을 성공적으로 상대하려면 반드시 동맹 세력을 구해야 한다. 동유럽의 발라히아 공국과 몰도바 공국은 불가리아의 확장을 경계하고 있으며, 헝가리와 보스니아 역시 세르비아의 성장을 경계하고 있다. 뛰어난 외교관이 있다면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상호 악감정을 이용해 서로 싸우게 만들거나, 튀르크 공국들 사이를 이간질하여 로마 제국에 대한 공격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시칠리아의 만종'의 결과로 벌어진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의 분리 역시 잘 이용한다면 앙주 세력이 제국 내부의 자기네 영지를 지원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남아 있는 라틴 공국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동맹 세력도 제한될 것이다.



정부와 사회


 콘스탄티누폴리스 함락 이후 로마인들의 정부는 수많은 변화를 겪었다. 수백 년 전 AD 7세기의 암흑시대처럼, 제국의 정부와 관료기구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야 했다. 그 결과 국가는 더욱 군사화되었는데, 정부의 민간 및 사회 담당 부문의 대부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위 조직을 포함해 정부 전체를 통괄하는 직책은 총리(메사존 혹은 메사스티키온)였으며 그 아래로 행정, 입법, 사법기구의 장인 메가스 로고쎄티스, 메가스 프로토프로에드로스, 프로타스크레테스가 있었다. 육군성과 해군성(세크레톤 투 스트라티오티쿠 & 세크레톤 투 플리무)은 강력한 상태로 존속되었지만, 반대로 대외 및 재무 부서 상당수는 사라지고 그 책임자들은 의전상 직책으로만 남았다. 그 외에 여전히 기능하는 부서로는 상업 해운을 담당하는 해운성(세크레톤 테스 쌀라세스)이 있었다. 로마 원로원 회의는 이제 황궁에서 열리는데, 원로원 회관이 불타 없어졌기 때문이다. 원로원 의원들은 대부분 정부 관리, 심지어 황제의 가까운 친인척들이었기 때문에 원로원에서 황제의 의견에 반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법 영역을 보자면, 1261년에 콘스탄티누폴리스가 수복된 이후 최고 법원(바실리콘 세크레톤)이 새로 세워졌다. 그 외에도 수도와 지역 각지에 지방 법원이나 순회 법원이 있어 사법을 담당했다.


 제국은 여러 테마와 케팔라티키아로 분할되어 있으며, "케팔레"라고 불리는 총독이 민정과 군정을 통괄한다. 그러나 그들이 통제하는 범위는 주요 도시에 한정되며 주위의 마을과 영지, 군대는 전혀 다른 체제 아래 있다. 과거의 테마 군제는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로마 제국은 새로운 징집 체제를 도입했다. 이제 제국군은 크게 프로니에(Pronoiai)와 알라기아(Allagia)로 구성되어 있다. 수도에 있든 지방에 있든 모든 제국군 병사들은 중앙에 소속되어 있으며 메가스 도메스티코스의 지휘를 받는다. 단 황제 직속 근위대는 메가스 프리미케리오스의 지휘를 받으며, 수도 근처나 황궁 내부에 주둔한다. 한편 제국 해군은 지속적으로 쇠퇴했기 때문에, 남은 함선들은 모두 메가스 둑스(Megas Doux)의 지휘 하에 수도 근처에 머무른다.


 이 모든 계급들, 직책들, 고급 칭호들은 몇몇 귀족 가문들이 수 세기 동안 독점해 왔다. 여러 추가 요소들이 있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제국 경영의 권리를 가진 것은 바로 이 귀족들이다. 이 귀족들의 사회 하류 계급에 대한 태도는 그리 바람직하지 못했으며, 오랫동안 자기들 이익에 따라 조세를 착취해 왔다. 그 결과 "대중(hoi polloi)"들은 기회가 주어지자 이를 놓치지 않고 착취자들에 항거했고, 우리가 다룰 시대에서는 하류 계급들이 칸타쿠지노스를 지지하는 귀족들에 대항해 섭정 정부를 지지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주목할 만한 예시가 바로 "쎄살로니키의 열심당(Zealots of Thessalonica)"으로, 그들은 총독과 그 부하들을 완전히 몰아낸 뒤 발칸 지역에 천 년 만에 "민주주의" 체제를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교회와 종교


 콘스탄티누폴리스의 로마 제국 교회는 여전히 전 세계를 아우르는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 비록 아시아와 유럽에서 많은 영토를 잃어버리긴 했지만, 로마 황제가 세속 권위의 수장이듯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세계총대주교는 여전히 전 세계 정교회 신도들의 종교적 수장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정교회 교구들이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1203년에는 불가리아의 대주교구가 독립한 뒤 1219년에는 세르비아 교회, 1381년에는 몰도바 교회가 뒤를 이었으며 이들은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의 권위를 명목상으로만 인정했다. 그러나 제국에서 종교 문제는 교회와 국가 모두에 영향을 끼치는 문제였고, 따라서 국가와 교회 모두 질서와 안녕을 지키기 위해 종교 문제에 개입했다. 특히 14세기 동안 교회와 국가는 "헤지카스트 논쟁"이라는 신학 논쟁에 휘말렸고, 이 논쟁은 기상천외한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vs 플라톤 철학, 유명론 vs 실재론, 수도원 vs 세속 사제단, 라틴 교회 vs 비잔티움 교회, 하류층 vs 귀족들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의 지지자들 vs 제국 섭정 정부의 구도가 된 것이다.


 헤지카즘(그리스어 Ησυχασμός, 정적, 안정, 고요함을 의미하는 Ησυχία에서 유래)은 정교회의 수도사들이 하던 은둔적인 기도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도가 마태복음 6장에서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한 데서 유래했으며, 감각을 버리고 내면에 깊이 침잠함으로써 신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얻고자 하는 과정이었다. 헤지카즘 수행자는 그 정신이 그 마음과 이어진 상태에서(실제로 얼굴을 심장 쪽에 대기도 한다) 마음과 정신으로 함께 예수의 기도를 바친다.("Κύριε Ἰησοῦ Χριστέ, Υἱὲ τοῦ Θεοῦ, ἐλέησόν με τὸν ἁμαρτωλόν;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를 통해 수행자의 의식은 더 이상 내면에서 명멸하는 표상들에 구애받지 않은 채 예수의 기도만을 반복하는 상태에 이른다. 이 경지에 이르는 것이 헤지카즘 수행자의 일생의 목표이며, 이 경지에 다다르게 되면 그는 명상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이 경험은 주로 빛으로 나타나는데 이 빛이란 곧 동방 신학에서 말하는 '창조되지 않은 빛'이며, 다볼 산의 예수 현성용 때 그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빛과 같은 것이다.


 이 수도사적 기도법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바로 정교회의 유식자였던 발람으로, 칼라브리아 출신 수도사였던 그는 당시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성 구세주 수도원의 원장이었다. 1337년 아토스 산을 방문한 그는 헤지카즘 수행자를 만나 그 기도법에 대해 들었고, 아토스 산의 수도사이자 헤지카즘 운동의 선구자였던 성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가 쓴 글도 읽었다. 서구 신학 체계에서 훈련받았던 발람은 이 기도법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이를 강력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헤지카즘은 이단이며 불경스러운 것이고, 신의 지식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더 지적이고 명제적인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헤지카스트 측에서는 새로 쎄살로니키의 대주교가 된 성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가 직접 나섰다. 그리스 철학에도 해박했던 그는 1340년대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열린 세 차례의 종교 회의에서 헤지카즘을 변호했고, 헤지카즘을 옹호하는 저작들을 남기기도 했다. 특히 1341년 수도에서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가 친히 주재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는 발람에게 죄를 묻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고, 발람은 칼라브리아로 돌아간 뒤 나중에 가톨릭 교회의 주교가 되었다. 그 뒤에는 발람의 친구였던 그리고리오스 아킨디노스가 논쟁에 가세했다. 그는 내전에도 관여하고 있었는데, 칸타쿠지노스는 헤지카즘에 우호적이었던 반면 섭정 정부는 적대적이었다. 이와 관련된 종교 회의는 세 차례 더 열렸는데, 그 중 두 번째에서 발람주의자들이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1351년 새 황제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 주재 하의 회의에서 헤지카즘 교리가 정교회의 정통 교리로 채택되었다.


유닛 개관


 팔레올로고스 시대의 로마군은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외국 군대들과 크게 다른 형태를 갖고 있었다. 징병 시스템은 지역 방위군인 카스트레니(Kastrenoi, 그리스어 kastron=성에서 유래), 소규모 자영농과 프로니아 보유자를 모두 포함한 직업군인인 알라기테(Allagitai, 제국 각지에 주둔한 제국군 연대=Allagia에 등록된 병사들), 수도에 주둔한 황실 직속, 혹은 특수부대인 바실리키[안쓰로피](Basilikoi[Anthropoi]=황실 소속[사람])로 나뉘었다. 그 외 다른 분류군으로는 신트로피에(Syntrophiai) 혹은 이테리에(Hetaireiai)로 불린 용병들, 혹은 동맹국이 로마군에 파견한 보조 병력들이 있었다.


 로마군의 이처럼 복잡해진 구성은 그 자체로는 나쁜 특징이 아니었다. 프로니아 소유자에서 용병, 소농 군인, 민병대, 황실 근위대에 이르는 다양한 병종들은 저마다 장점이 있었고, 이들이 한데 통합됨으로써 서로 다른 병종들의 고유한 약점을 메꿔 주는 효과가 있었다. 프로니아 소유 병사들은 소농 병사들과 달리 거의 중기병이었다. 이들은 현금을 받는 용병들과 달리 국가 재정에 직접적인 부담이 적었으며, 국가가 직접 경영하기 어려운 곳을 프로니아로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프로니아로 할당받은 지역들은 대개 외딴 곳이 많았기 때문에 급히 소집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으며, 자기 지역에서 나오는 수익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오래 걸리거나 멀리 떨어진 곳에 대한 원정에도 참여하기 어려웠다. 반대로 용병들은 보수가 제대로 나오는 한 끝까지 원정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가장 유지비가 비싼 부류였기 때문에 국고가 모자라 동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소농 병사들은 가격대 성능비가 가장 뛰어났으며, 대개 해당 지역의 토박이가 되어 살았으므로 프로니아 소유자나 용병들에 비해 변경 지역을 방비하는 데에도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잘해봐야 경기병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고, 낙후되고 배타적인 이방인인 경우가 많았으므로 규율이 엄정하다거나 신뢰할 만한 병사들은 아니었다. 한편 황실 직속 부대는 야전군의 핵심을 담당할 수 있는 병력들이었지만, 숫자가 너무 적어서 다른 병종들의 지원 없이 중요한 결과를 내기는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파수꾼, 농민, 징집병, 경비병 따위로 구성된 지방 민병대는 군대의 머릿수를 늘리는 데는 효과가 있었지만 막상 전투에서 뭔가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수준이었다.



카스트레니 Kastrenoi


 사료들에 따르면 도시 성곽과 성채 수비, 그리고 주변 지역을 경비하는 일은 민간인들의 의무였는데, 이 의무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었다. 짜코니케 필락시스(짜코니아 경비대), 필라케스 폴리테(시민 경비대), 비글레(라틴어 Vigiles에서 유래= 감시자) 등의 용어가 언급된다. 이 중 짜코네스 혹은 차코네스라는 이름은 10세기 콘스탄티노스 8세 포르피로예니토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당시에는 너무 가난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된 병사들이 모여 구성된 요새 수비대들로 나온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용어는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가 펠로폰네소스 지역(특히 라코니아=차코니아)에서 데려와 해병대 겸 황실 수비대로 운용했던 경무장 군대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1. 아콘티스테 Ακοντισταί

아콘티스테 Akontistai  (다른 이름 : 파리키 Parioikoi, 프실리 Psiloi)


 아콘티스테는 지방 권력자의 명령 때문에 싸우러 나온 가난뱅이들로, 군사 훈련이나 규율과는 한참 거리가 먼 농민에 불과하다. 아마도 지방에서 징집된 군대의 대다수 병력은 이런 자들일 것이다. 이들의 주 무기는 사냥용 투창이지만 만약을 위해 도끼나 단도, 작은 나무 방패 같은 것도 가지고 있다. 투창은 기병대에게 비교적 효과적이지만 이들의 근접전 능력은 매우 취약하다.



2. 프실리 Ψιλοί

프실리 Psiloi

프실리는 전시에 향토 방위를 위해 징병되거나 끌려온 농민 궁병대이다.  대개 작은 활과 단도, 짧은 칼 따위로 무장했는데, 이들이 쓰는 활은 전쟁에 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냥용으로 만든 것이라 장력이 약하다. 이 농민들은 사냥을 위해 활을 다루기는 하지만, 군대에서 쓰는 합성궁은 거의 쏴 본 적이 없는 자들이다. 따라서 뛰어난 궁병대로서의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다.



3. 비글레 페지 Βίγλαι Πεζοί

비글레 페지 Viglai Pezoi (다른 이름 : 필라케스 Phylakes, 짜코네스 Tsakones, 필라케스 폴리테 Phylakes Politai)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로마인 마을들에서 마을 경비대 복무는 주민 거의 모두가 돌아가면서 참여하는 일이다. 또 주변에 성(Kastron)이 있다면, 그 성의 보호 범위 안에 드는 지역 주민들은 성의 방위 임무에 참여해야 한다. 도시에서는 '아포비글리시스'를 부과받은 시민들이 성문에서 보초를 서거나 야경꾼 역할을 하며, 성채에서 야간 감시, 불 관리, 관리들의 명령 집행 등을 담당한다. 이런 의무들은 교대제로 이루어지며, 담당자들은 관청에서 지급한 창과 가벼운 방패로 무장합니다. 갑옷은 찾아볼 수 없고, 그나마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이 두꺼운 누비옷을 사 입는 정도입니다.



4. 비글레 이피스 Βίγλαι Ιππείς

비글레 이피스 Viglai Hippeis (다른 이름 : 필라케스 Phylakes, 짜코네스 Tsakones, 필라케스 폴리테 Phylakes Politai)


성 밖의 감시초소나 감시탑 등을 담당하고 주변 지역에 나타날지 모르는 도적떼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말 탄 민병대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1342년 조그라푸의 수도원 앞으로 된 가짜 금인이나 1228년 나브팍토스의 주교 요안니스 아포카브코스 등등 여러 사료에서 말 탄 경비병(viglai)이 언급되며, 요새화된 거점 어느 곳에든지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장거리 이동을 위해 말을 탔다는 것을 제외하면 무장은 일반 경비병들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타고 다니던 말이 크고 힘센 군마나 종마일 리는 없고, 아마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짐말이었을 것입니다.



5. 차코네스 Τσάκωνες

차코네스 Tsakones (다른 이름 : 필라케스 Phylakes, 카스트로필라케스 Kastrophylakes)


사회적으로 좀더 중요하고 인구도 많은 성에는 임시직 징집병들 대신 독자적인 전문 경비 부대가 주둔합니다. 이 차코네스(Tsakones, 수도의 해병대/황궁 경비대와 구분하기 위해 Tzakones 대신 Tsakones라고 씀; 번역시에는 임의로 짜코네스/차코네스로 씀) 부대는 시민들이 낸 "비글리아티콘"이라는 세금에서 봉급을 받으며, 금속제 갑옷을 살 정도로 여유가 있습니다. 칼로 무장한 이들은 지역 민병대의 핵심 중추가 되며, 지역 관리의 호위대로 일하기도 합니다.





알라기테 Allagitai


 지방에 주둔한 프로니아 보유자들로 구성된 부대들은 알라기아(연대)라고 불린다. 이 알라기아는 지방 행정과 군사 부문에서 과거 테마 제도가 하던 역할을 재구축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 결과 알라기아에 소속된 병사들의 범주는 소규모 자작농 병사에서 유명한 귀족 가문 출신의 지방 호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졌다. 이들은 보통 지역 방위를 담당하지만 카스트레니와는 달리 군사 원정에도 참여하며, 드룽기(과거의 클리수레)라 불리는 변경지대의 요새나 야영지를 지킨다.


 사료에 따르면 큰 규모의 부대들, 예컨대 쎄살로니키 방면의 부대들은 메갈레 알라기아(대 연대)라고 불렸다. 당대 사료들은 중기병에 대해서만 다루는데, 칸타쿠지노스가 "제대로 쓸만한 병사라고는 부유한 기병들(스트라티오테)와 라틴 용병들밖에 없다"라고 말했다는 식이다. 스도-코디노스는 대 연대에 소속된 스트라티오테, 카발라리, 디나티 같은 중기병들은 '메갈로알라기테'라고 불린다고 했다. 이 돈 많은 군인들은 장기 원정에도 참여할 수 있었으며, 여러 마리의 말에다 시종들까지 데리고 다녔다. 스도-코디노스는 뒤이어 '덜 중요한' 군인들로 트리카발리, 디카발리, 모노카발리가 있다고 했는데, 이는 각각 말 세 마리, 두 마리, 한 마리를 끌고 다닌다는 뜻다. 이들은 가난한 지역, 좁은 구역을 프로니아로 받았거나 자영농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경무장했다.


 사료에서 기병대 외의 병사들에 관한 정보는 직접 언급되지 않아서 유추할 수밖에 없는데, 아마도 모든 알라기테들이 부유하거나 경제적으로 안정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들은 자기 연대의 이름을 딴 도시에서 복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보루, 탑, 성채 등의 주둔군으로도 복무해야 했다. 당대 로마 기록자들은 병사들을 크게 프실리(Psiloi, 경장보병), 오플리테(Hoplitai, 중장보병), 카타프락티(Kataphraktoi, 중장기병)의 3가지로 구분했는데, 대부분은 이들 중 중장기병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다. 그 결과 정규군의 중핵을 담당했을 것이 분명한 다수의 보병들이 기병이 아니라는 이유로 기록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 톡소테 Τοξόται


(갑옷 업그레이드)

톡소테 Toxotai (다른 이름 : 프실리 Psiloi)


 알라기아 부대에는 변경 수비대가 포함되며, 변경 수비대에는 보루를 지키는 궁병들이 있었다. 궁병들은 원정 작전시 전투 이외에 군대가 숙영하는 야영지를 경비하는 역할도 맡았다. 칸타쿠지노스는 이 궁병들이 황제의 명을 받아 변경을 지키러 왔다고 말했는데, 이는 곧 정규군임을 뜻한다.


 당대 로마인들 중 활을 다루는 부류는 경보병 뿐이었는데, 상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들이 쓰던 활은 흔히 "스키타이식 활"이라 불리는 뒤쪽으로 휜(re-curved) 합성궁으로, 끝부분에는 짐승의 뿔이나 뼈를 썼다. 크기가 작아서 마상 궁술에 적합하며, 마상이든 아니든 화살통은 옆구리에 멨다. 급료가 나오는 때도 있긴 했지만 대체적으로는 전시의 약탈에 의존해야 했다. 보통은 활과 화살에 더해 둥근 방패, 짧은 칼, 도끼 정도를 휴대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돈이 좀 들어오면 누비 갑옷을 살 수 있었고, 개중 횡재한 자들은 사슬 갑옷까지도 구했다.



2. 펠타스테 Πελταστα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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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타스테 Peltastai (다른 이름 : 트라페지테 Trapezitai, 아크리테 Akritai, 스코피 Skopoi)


 이들의 이름은 그리스어 "펠타"에서 왔는데, 이는 나무나 쇠로 만든 작은 방패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펠타를 든 병사라서 펠타스테다. 변경 수비대에 속한 이 병사들은 사료에서도 자주 나오는 편이다. 고지인(Highlander)이라고도 하고, 과거에는 아크리테(Akritai)라고도 불렸지만 제국 서부에서는 대부분 펠타스테라고 부른다. 이들의 주요 역할은 전략적 요충지에 설치된 보루나 요새화된 도로를 지키는 것이다. 대개 자영농이나 소규모 지주 출신의 임시직 군인들이며, 요충지 근처에서 모여 산다. 2~3개의 중투창과 근접무기를 쓰는데, 일반 시민들보다 잘 훈련받았기 때문에 도끼 등 다양한 무기를 쓰는데, 가장 많이 쓰는 건 칼이다. 가죽 누비 갑옷을 입었지만 원정에서 한몫 잡으면 사슬 갑옷을 살 것이다.



3. 이코노미에 Οικονομία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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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에 Oikonomiai (다른 이름 : 트라페지테 Trapezitai, 아크리테 Akritai)


 이들은 이코노미아를 가진 농민 겸 군인들인데, 이코노미아란 프로니아와 비슷하지만 그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토지 권리이다. 경보병과 경기병으로 복무하는 이 병사들은 지방 출신 부대, 그리고 그 휘하의 변경 수비대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찌르는 창 하나에 투창 여러 개, 삼각 방패와 누비 혹은 미늘 갑옷으로 무장했으며 본격적인 전투에 나서기보다는 게릴라전이나 추격에 활용되는 편이 낫다. 분류하자면 경기병에 속하며, 펠타스테가 말을 탄 형태라 할 수 있다. 펠타스테와 마찬가지로 자영농 혹은 소지주 출신으로 변경 지역을 방비하며, 이런 지역은 주로 고산 지대가 많았기 때문에 고지인이라고 불렸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과거의 아크리테와 거의 같은 역할이며, 그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로마니아의 변경을 지켜오고 있다.



4. 짠그라토레스 Τζανγκράτορες

짠그라토레스 Tzangratores (다른 이름 : 짠그라토리 Tzangratoroi, 짠그로톡소테 Tzangrotoxotai, 잔그라토레스 Zangratores


 로마인들은 석궁을 늦게 받아들였고, 그 때문에 '석궁병'에 대한 일관된 표기가 없다. 13세기 역사가 니키타스 호니아티스가 짠그라토레스, 짠그라토리, 짠그로톡소테 등으로 표기한 식이다. 석궁(그리스어 Tzangra, 라틴어로 게를 뜻하는 Cancer에서 유래)이 사료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은 1020년대이다. 우리가 다룰 시대에 석궁이 사용된 것은 확실한데, 칸타쿠지노스의 기록에 따르면 안드로니코스 3세의 아프로스 포위전 때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기병 220명, 궁병 200명, 석궁병 30명을 도시에 지원군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쎄살리아의 주둔군을 다룬 사료에서도 석궁병이 언급되며, 스도-코디노스는 콘스탄티누폴리스 성벽 수비대의 석궁병들을 지휘하는 "짠그라토레스의 스트라토페다르키스"를 언급한다.(이 직책은 비잔틴 말기의 다른 서열 리스트에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석궁병들의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자료도 없는데, 이는 그들이 별볼일 없는 지위에 머물렀음을 암시한다. 다만 특수한 경우, 13~14세기 벨기에의 사수 조합과 비슷한 현상이 보이기도 한다. 짠그라토레스는 일반 궁병들보다 많은 급료를 받기 때문에 갑옷을 더 잘 챙겨 입었다. 누비 갑옷 혹은 사슬 갑옷을 입었는데, 중무장의 결과 원거리 전투력은 물론 근접전에서도 효과적인 부대가 될 수 있었다.



5. 콘타라티 Κονταράτο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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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타라티 Kontaratoi (다른 이름 : 스쿠타티 Skoutatoi, 오플리테 Hoplitai)


 보병(Pezoi)은 크게 중장보병과 경장보병으로 나뉘는데, 칸타쿠지노스를 포함한 당대의 사료에서는 각각 오플리테(혹은 오플리티콘[+포싸톤;군대])와 프실리(혹은 프실론[+포싸톤])라고 썼다. 오플리테는 배를 타고 이동할 때나 배싸움이 났을 때 주로 활용되었다. 물론 육군이나 수비대에도 오플리테가 있었지만, 적어도 하나 이상의 사례에서 그들이 보병으로 싸운 이유는 말이 모자라서였다. 이를 통해 오플리테라는 말은 중무장한 보병 뿐 아니라 원래 기병인데 말이 없거나 임시로 말에서 내려 싸웠던 자들까지 포함하는 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잘 훈련된 병사로, 한때 막강했던 로마 정규군의 마지막 남은 유산이다.


 당대의 그림들을 보면 보통 병사의 장비는 짧은 소매가 달린 짧은 사슬갑옷 상의였고, 여기에 가끔 목 보호대나 미늘, 라멜라 흉갑이 추가되는 식이었다. 길고 양변이 직선인 삼각형의 로마식 방패를 들었으며 무기로 창(콘타리온)을 썼는데, 달리 말하면 창을 든 스쿠타티가 된다. 돈을 모아서 더 좋은 갑옷을 사거나 사령관으로부터 선물받는 경우도 있었다. 최종적으로 이들의 무장은 방어용이 되며, 방어형 중보병은 시가전에서나 야전에서나 군대의 탄탄한 중추가 된다. 현존하는 사료들에 보면 이들의 옷은 대개 빨간색이나 파란색이었는데, 가끔 녹색이나 연보라색, 보라색도 눈에 띈다. 다른 병사들과 함께 이들도 특별 세금을 통해 급료를 받았는데, 이 세금에는 다양한 이름이 있었다. 하나는 "징수하다" 라는 뜻의 엑셀라시스(혹은 에크볼라이)에 콘타라타(창병), 페지(보병), 플리미(선원), 톡소테(궁병) 등등을 붙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콘타리아티콘(창 값)", "엑셀라시스 플리몬(선원용 징수)", "도시스 톡사리온(활 사주기)", 15세기 문서에서 발견된 "에브레시스 바스물론(가스물리 창설)" 등이 있다.



6. 스파싸티 Σπαθάτο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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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싸티 Spathatoi (다른 이름 : 스쿠타티 Skoutatoi, 오플리테 Hoplitai)


 스파싸티(그리스어로 검병)은 콘타라티가 창 대신 칼을 든 것으로, 달리 말하면 칼을 든 스쿠타티가 된다. 당대의 그림들을 보면 보통 병사의 장비는 짧은 소매가 달린 짧은 사슬갑옷 상의였고, 여기에 가끔 목 보호대나 미늘, 라멜라 흉갑이 추가되는 식이었다. 길고 양변이 직선인 삼각형의 로마식 방패를 들었으며 무기로 칼(스파씨온 혹은 파라메리온)을 썼다. 이와 같은 중보병은 시가전에서나 야전에서나 군대의 탄탄한 중추가 된다. 현존하는 사료들에 보면 이들의 옷은 대개 빨간색이나 파란색이었는데, 가끔 녹색이나 연보라색, 보라색도 눈에 띈다.



7. 스트라티오테 Στρατιώται

스트라티오테 Stratiotai (다른 이름 : 프로니아리 Pronoiarioi)


 프로니아(사전적으로는 섭리, 보살핌, 배려 등)는 로마 제국 말기, 황제가 개인 또는 집단에게 국가의 세원 중 일부를 할당하여 부여한 사용권을 가리키는 말이다. 프로니아에 포함된 권리는 구체적으로 해당 지역의 농민(파리키)에게 부과된 세금과 국역, 부동산에 부과된 세금의 사용권이다. 부동산은 대개 땅이었지만 제분소, 광산, 어장, 부두 등등 다양했다.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프로니아를 받았지만, 수적으로 거의 대부분은 군인이었으며 이 프로니아 소유 군인들이 후기 로마군의 핵심이었다. 사실 사료들을 읽어보면 병사들에게 봉급을 줄 방법으로는 현금 아니면 프로니아밖에 없는 것처럼 쓰여 있다. 칸타쿠지노스 역시 이 두 부류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프로니아리가 용병(외국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과 다른 것은 "마을로부터의 수입"을 받는 점이라고 했다.


 문헌 사료에서 프로니아는 보통 이코노미아(안배, 시혜)라고 쓰이며, 때로는 포소테스(양, 가치)라고도 쓰이지만 정작 프로니아라는 말은 잘 쓰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프로니아 보유자를 "프로니아리오스"라고 쓰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13세기에는 그냥 "프로니에를 가진 자들"이라는 표현이 쓰였고, 14세기 이후에는 "스트라티오테스(군인)"이라는 말이 독점적으로 쓰였다. 다만 프로니아로 봉급을 받는 병사가 군대의 다수를 차지하지는 않았고, 프로니아 보유자보다는 자영농 병사나 용병의 숫자가 더 많았다. 프로니아 소유자들은 자영농들에 비해 더 넓은 땅을 가졌으므로 일반적으로 직접 경작을 하지 않고, 영주나 징세관처럼 행동했으며 이들이 가진 땅은 대개 외진 곳에 있었다. 프로니아를 받은 스트라티오테스는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기는 하지만 귀족사회의 확고한 일원이 된다든가 하는 식으로 엄청난 신분상승을 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냥 군인이자 하급 귀족 정도의 지위에 머물렀다. 어쨌든 이들은 벌어들인 돈으로 사슬 갑옷, 창, 메이스, 칼, 무거운 삼각 방패 등 비싼 장비를 살 수 있었다. 넓은 챙이 달린 chapel-de-fer 투구나 꽤 크고 얼굴 가리개까지 달린 사슬 갑옷도 썼다. 위에 덧입은 라멜라는 스텝 지역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몇몇 그림을 보면 단단해 보이는 팔 보호대가 보이는데, 다른 갑옷 아래에 장비하며 아마 경화 가죽이었을 것이다. 뻣뻣한 승마용 장화는 조지아의 알란인들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8. 카발라리 Καβαλλάριοι

카발라리 Kavallarioi (다른 이름 : 리지 Lizioi)


 라틴 제국이 멸망한 이후, 남은 서유럽 기사들 중 일부는 재건된 로마 제국에서 "새 직장"을 구했다. 이들 대부분이 제국에 완전히 정착하여 황제의 군대에서 정규군으로 복무했고, 이 기사들과 그 후손들은 프로니아 제도에 포섭되었다. 비록 라틴인 기사 출신이기는 해도 이들은 이제 로마 제국에 완전히 동화되어 로마인처럼 입고 로마인처럼 말하며 살았고, 그들의 후손들은 완전한 로마인이 되었다. 황제에 대한 충성과 전쟁에서의 용맹은 봉토와 명예로운 칭호로 보상되었는데, 이 칭호를 통해 그들은 끝자리이긴 해도 최소 둘 이상의 의전 서열 목록에 낄 수 있었다. 이들이 정착하면서 "기병"을 가리키는 일반 명칭이었던 카발라리오스 역시 서구식의 "기사"를 의미하는 말로 한정되기 시작했다. 이들의 무장은 반(半) 서구식으로, 서구식 대형마에 사슬 갑옷을 입고 서구식 삼각 방패에 두꺼운 랜스, 장검을 썼지만 마갑은 없었다. 동방 기병들처럼 민첩하지는 못하지만 강력한 돌격 능력과 근접전 능력을 갖췄는데, 그래도 진짜 서구 기사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기사, 카발라리는 사기, 승마술, 기사도, 장비 면에서 스트라티오테보다 한 단계 더 뛰어난 병력이었다.  카발라리는 과거의 카타프락티 격에 해당하는 디나티(호족 기병대)를 제외하면 로마인들이 동원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기병으로써, 철제 마갑의 정신나간 비용 부담 없이도 뛰어난 중장기병을 운용할 수 있다는 가장 큰 희망이었다.



9. 디나티 Δυνατο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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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나티 Dynatoi (다른 이름 : 아리스토크라테 Aristokratai, 메기스타네스 Megistanes, 로가데스 Logades, 아리스티 Aristoi, 아르콘테스 Archontes)


 이들은 아리스티(최고의), 에피파니스(저명한), 에브예니스(고귀한 혈통의), 로가데스(엄선된), 디나티(유력자), 에브예니스테리(귀족)이며 메기스타네스(호족)이다. 이들은 많은 농민이 있는 광대한 세습 프로니아를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사병을 가진 자들도 있다. 여러 겹의 사슬과 미늘 갑옷을 껴입고 말에도 갑옷을 입힌 이 기병들은 강력한 판금 갑옷을 갖춘 서구 기사들에 비하면 다소 처지는 편이긴 해도, 제국 내의 프로니아 보유자들 중에서는 가장 중무장한 병사들이다. 과거 카타프락티의 후예라 할 만한 이 병사들은 무거운 창/랜스를 주 무기로 쓰지만, 로마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무기인 메이스에 긴 삼각 방패도 쓴다. 이들은 보통 이키이(혈족, 동료)나 이키테(가신)들로 구성된 수행원들을 동반하는데, 가장 많은 축이라 해도 30~80명을 넘지 않으며 보통은 열 명 이하 정도이다.





바실리키 Basilikoi


 제국 말기 황실 직속 부대들의 정확한 조직 구성과 기능 및 중요성은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운데, 가용한 정보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쎄오도로스 2세, 안드로니코스 3세, 요안니스 4세 등 많은 황제들이 직속 부대를 이끌고 친히 전장에 나섰고, 1422년 무라드 2세, 1453년 메흐메드 2세가 쳐들어왔을 때에도 크레타인 근위대와 함께 수도를 지켰지만 그들의 규모가 정확히 얼마였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이에 관련된 유일한 기록은 1341년 안드로니코스 3세가 서거한 직후 칸타쿠지노스가 자신의 사병(Oikeioi)과 황실 병력(Basilikoi)으로 총 500명을 모아 황궁으로 보내 어린 황제를 지키게 했다는 것 뿐이다. 나중에 이 병력 숫자는 기존 수준으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그러므로 황궁 경비 병력은 대략 3~400명 정도였을 것이다.


 어쨌든 정보를 추려 보면 유명한 도끼잡이 바랑기 근위대는 창설된 지 350년이 지나 우리가 다룰 시대에도 잔존했고, 그보다 덜 유명한 부대들도 있었음이 확인된다. 나열하자면 칼로 무장한 기병과 보병 부대로 구성된 파라모네 근위대, 로마인뿐 아니라 투르크인들도 포함된 보병 궁병대인 무르타티, 곤봉을 들고 흰 사자 무늬의 파란 외투를 걸친 짜코네스, 채찍을 들고 다니며 경찰 업무를 담당한 바르다리오테, 무슨 무기를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황제의 텐트에서 일하던 코르티나리 등이 있다.


 이에 더해 규모가 대폭 축소되어 수도에만 머무르게 된 제국 해군도 독자적으로 부대를 충원했다. 대표적인 것이 석궁으로 무장한 라틴인-로마인 혼성 부대 가스물리와 위에서 언급한 짜코네스, 그리고 프로살렌테가 있었다. 앞의 둘은 일종의 해병대로서 콘스탄티누폴리스와 트라키아 지역에 정착했고, 프로살렌테는 함대의 노잡이로서 에게 해 북부의 해안가 각지에 정착했다.



1. 엥길로바랑기 Ενγκλινοβάραγγο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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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길로바랑기 Englinovarangoi (다른 이름 : 펠레키포리 Pelekyphoroi, 켈테스 Keltes, 바랑기 Varangoi)


 군대에 러시아인, 스칸디나비아인 용병이 처음 나타난 것은 로마와 러시아가 처음 접촉한 9세기 경이었고, 988년 키예프 국가가 개종하면서 강력한 바랑기 근위대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11세기에 이미 바랑기 근위대는 군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되었고, 곧 이어 황제의 신변을 직접 경호하는 황실 근위대로 자리잡았다. 11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구체적으로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로 많은 앵글로색슨인들이 근위대로 유입되기 시작했고, 바랑기의 스칸디나비아적 특성은 점차 약해졌다. 어쩌면 12세기 말, 확실하게는 13세기부터 바랑기 근위대의 거의 대부분은 영국 출신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스도-코디노스는 그들이 황제에게 환호를 보낼 때 영어를 썼다고 했다. 그 결과 13세기 이후로는 "켈트 근위대", "켈트 경비대" 혹은 아예 "켈트"라는 말 자체가 바랑기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이들의 주 무기는 항상 오른쪽 어깨에 걸치고 다니는 유명한 양날 도끼[펠레키스]였다. 도끼를 항상 가지고 다니는 병사들은 이들밖에 없었으므로, 사료들은 흔히 이들을 가리켜 "황실의 도끼잡이[펠리키포리]", "황실 도끼병 연대", "켈트족 도끼잡이들"이라고 불렀다.


 바랑기 근위대에 대한 마지막 기록들은 15세기 초에 걸쳐 있다. 1395년에는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사는 "바랑기 출신"의 "최고 법관"인 아담의 집에 법관 동료가 법전을 찾으러 왔다는 기록이 있고, 1400년(혹은 약간 나중에)에 쓰여진 두 글에는 "가장 충성스러운 바랑기 출신의 키리오스 시몬"의 죽은 딸이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사는 의사와 결혼했었다는 내용이 있다. 마지막으로 서유럽의 한 연대기를 보면 1404년 우스크의 아담이라는 영국인이 로마를 방문했다가 비잔티움 대사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그들 말로는 자기네 나라에는 도끼를 들고 다니는 영국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적어도 그때까지는 바랑기 근위대가 종족적 정체성과 군사적 역할, 명성을 유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파라모네 페지 Παραμοναί Πεζο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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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모네 페지 Paramonai Pezoi


 황제 직속 연대 중 하나인 파라모네('누군가, 무언가 근처에 서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Παραμένω에서 유래)에 대한 첫 기록은 13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등장한다. 스도-코디노스는 "황궁의 궁정에는 파라모네라는 말 탄 병사들이 있으며, 그들의 지휘관은 알라가토르라고 부른다. 말을 타지 않은 또 다른 부대도 파라모네라고 부르는데, 마찬가지로 알라가토르를 지휘관으로 두고 있으며 모두 칼을 들고 다닌다." 1272년 미하일 8세가 아들 안드로니코스에게 남긴 프로스타그마(파라모네에 대한 확인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와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의 역사서에 남은 주석을 보면 파라모네는 바랑기와 함께 언급된다. 하지만 바랑기와 달리 파라모네는 내국인들로 구성되었다. 종교적 신념 때문에 일생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낸 부주교 요르요스 메토히티스는 "황궁에는 두 개의 근위 연대(Tagmata)가 있는데, 우리 동족들로 구성된 부대의 이름은 파라모네이고, 외국인 부대의 이름은 바랑기이다" 라고 썼다.



3. 파라모네 이피스 Παραμοναί Ιππεί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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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모네 이피스 Paramonai Hippeis


 황제 직속 연대 중 하나인 파라모네('누군가, 무언가 근처에 서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Παραμένω에서 유래)에 대한 첫 기록은 13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등장한다. 스도-코디노스는 "황궁의 궁정에는 파라모네라는 말 탄 병사들이 있으며, 그들의 지휘관은 알라가토르라고 부른다. 말을 타지 않은 또 다른 부대도 파라모네라고 부르는데, 마찬가지로 알라가토르를 지휘관으로 두고 있으며 모두 칼을 들고 다닌다." 1272년 미하일 8세가 아들 안드로니코스에게 남긴 프로스타그마(파라모네에 대한 확인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와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의 역사서에 남은 주석을 보면 파라모네는 바랑기와 함께 언급된다. 하지만 바랑기와 달리 파라모네는 내국인들로 구성되었다. 종교적 신념 때문에 일생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낸 부주교 요르요스 메토히티스는 "황궁에는 두 개의 근위 연대(Tagmata)가 있는데, 우리 동족들로 구성된 부대의 이름은 파라모네이고, 외국인 부대의 이름은 바랑기이다" 라고 썼다.



4. 짜코네스 Τζάκωνες
짜코네스 Tzakones (다른 이름 : 라코네스 Lakones)


 미하일 8세는 모레아, 그리고 아마도 다른 지역들에서 많은 주민들을 콘스탄티누폴리스로 이주시켰고, 그 중 장정들을 새 함대에서 일할 병사들로 징집했다. 파히메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미하일은 수도 안정시킬 경무장 병사들이 매우 필요했기 때문에 모레아에서 라코네인들(Lakones)을 불러왔다. 그들이 전쟁에서 훌륭한 모습을 보였으므로 황제는 수도 근처의 땅을 분배하여 그들을 정착시키고 연봉 등 많은 것을 지원해 준 뒤, 콘스탄티누폴리스 안팎의 갖가지 사태를 해결하는 데 이용했다." 이 라코네스-짜코네스들은 1261년 후반~1262년 초반에 콘스탄티누폴리스에 도착했고, 가스물리(Gasmouloi)와 함께 미하일의 새 함대의 첫 번째 군사 부대가 되었다. 12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며 짜코네스와 가스물리는 로마 해병대의 기본이 되었다. 앞서 인용한 부분에서 파히메리스는 그들을 라코네스 혹은 라코네인, 즉 모레아의 남동쪽 미스트라 근처에서 온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변형되어 짜코네스가 되었다.


 미하일 8세의 짜코네스 부대는 모레아에서 이주된 자들 출신으로, 아마 모넴바시아 출신자들부터 시작해서 모레아의 다른 지역 출신자들까지 확대되었던 것 같다. 그 외에도 해병대, 경무장한 성벽 수비대, 혹은 황궁 수비대 등으로 복무하기 위해 온 다른 지역 출신자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미하일의 짜코네스 부대가 철저히 라코네, 혹은 모레아 지역에서만 선발되었으리라고 단정할 이유는 없지만, 파히메리스는 분명하게 이 병사들 중 대부분이 펠로손네소스 반도 동부 출신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미하일의 짜코네스 부대는 단지 이름만 짜코네스가 아니라 실제로도 어느 정도 짜코네스인들로 구성된 부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짜코네스가 호위대 혹은 황궁 수비대로 복무할 때에는 곤봉이나 둔기(아펠라티키아)를 들고, 흰 사자 두 마리가 마주보는 문양이 앞뒤에 들어간 하늘색 겉옷을 입었다. 그들의 지휘관은 "짜코네스의 스트라토페다르키스"였다.



5. 무르타티 Μουρτάτοι

무르타티 Mourtatoi (다른 이름 : 미르타티 Myrtatoi)


 스도-코디노스에 따르면 무르타티는 보병 궁수였으며(Chronicon Tarvisinum도 이를 뒷받침한다), "무르타티의 스트라토페다르키스"의 지휘를 받았다. "무르타티"라는 단어는 배교자나 배신자를 뜻하는 아랍어 기원의 터키어 단어 "무르테드"나 "무르타트"에서 유래한 단어였고, 따라서 기독교로 개종한 튀르크인들로 구성된 부대일 것이라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자칭 도미니크회 수사인 한 라틴인이 1330년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재위 1328-50)에게 십자군 종군을 촉구하기 위해 쓴 글 "해외 여로를 위한 조언"에는 약간 다른 주장이 실려 있다. "그들은 튀르크인과 그리스인 사이의 혼혈아들입니다. (중략) 말하자면 사탄과 마귀 사이의 혼혈아들인 셈입니다."


 무르타티 중에는 황궁 수비대도 있기는 했지만, 모든 무르타티가 황궁 수비대였던 것은 아니다. 무르타티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은 사람들을 널리 부르는 이름이었고, 황궁의 무르타티 연대는 무르타티들로 구성되어서 무르타티 연대라고 불렸을 뿐이다. 이들은 종족적인 부분을 포함해 "투르코풀리"와 어느 정도 비슷한 형태의 병사들로써, 투르코풀리와 마찬가지로 동부 지중해의 여러 십자군 국가들에서 병사로 이용되었다.(베네치아도 그 중 하나였고...) 무르타티들은 지속적인 훈련과 연습을 통해 뛰어난 궁술 실력을 유지했고, 그 때문에 제국 근위대에 고용되었다. 근위병으로써 이들은 다른 대부분의 궁병들보다 좋은 방어구를 갖췄다.



6. 가스물리 Γάσμουλο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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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물리 Gasmouloi (다른 이름 : 바스물리 Basmouloi)


 가스물리는 쎌레마타리와 함께 로마인들과 라틴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의 결과였다. 그러나 가스물리는 쎌레마타리와 달리 경제적 관계가 아닌 혼인 관계와 친교 관계를 통해 형성된 집단으로, 라틴 정복 한참 이전부터 이후까지 계속 존재했다. 가스물로스라는 단어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라틴어 mulus(노새; 말과 당나귀 사이의 잡종-역주)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무르타티 편에서 소개한 "해외 여로를 위한 조언"에서는 이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스물리라고 불리는 이 자들은 그리스인 아비와 라틴인 어미, 혹은 라틴인 아비와 그리스인 어미 사이에서 태어난 자들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오락가락하고, 약속은 믿을 수 없으며, 말은 의심스럽고, 악행에 능하며, 선행에는 무지하고, 높은 사람들에게 버릇없고, 툭하면 다투며, 노략질에 익숙하고, 야만적이며, 경건함과는 거리가 멀고, 살인과 살상에 굶주렸으며, 잠시도 가만있질 못하고, 술 마시길 좋아하고, 자제심 없이 마구 싸제끼고, 탐욕스러우며, 폭음과 폭식을 즐기고, 자기네 동족이나 동류가 아닌 자들은 모두 미워합니다. 그들은 그리스인 앞에서는 자기가 그리스인이라 하고 라틴인 앞에서는 라틴인이라 하며, 도대체 도움되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이 파괴할 줄만 아는 자들입니다."


 가스물리는 원래 함대에 배속된 용병 부대로 출발했으나, 미하일 8세는 수도를 수비하고 새 인구를 정착시키며 함대를 운용하는데 필요한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앞서 설명한 짜코네스인들을 끌어올 정도였다. 가스물리는 석궁으로 무장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비잔티움에선 석궁을 '라틴 활'이라고도 불렀다. 제국 해군에서 오랫동안 복무하면서 잘 훈련된 이들은 원거리에서 매우 위력적인 부대가 될 수 있었다. 원래는 해군 소속이지만, 이후 황제들 치세에 해군의 규모가 점점 축소되고 병력 수요가 급증하게 되자 육군에도 동원되기 시작했다.



7. 시포나토레스 Σιφωνάτορες

시포나토레스 Siphonatores (다른 이름 : 시포나리 Siphonarioi)


  "그리스의 불", 혹은 그들 표현대로라면 "Υγρόν Πυρ(액체 불)"은 로마군의 전통적인 무기들 중에서 가장 이색적이면서도 강력했던 무기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Πυρ Ρωμαϊκόν(로마의 불)", "Πολεμικόν Πυρ(전쟁의 불)", "Πυρ Θαλάσσιον(바다의 불)", "Πυρ σκευαστόν(가공된 불)" 등이 있었다. 제국 말기 시대에 소위 "그리스의 불"이 사용되었다는 수많은 단편적인 기록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물론 1453년 콘스탄티누폴리스 최후의 포위 때에도 그리스의 불이 사용되었다. 일례로 튀르크인들이 곡물을 싣고 들어오던 배를 나포하려 하자 그리스의 불을 이용해 격퇴했다. 그리스의 불은 공성탑을 상대로도 효과적이었다. 요한 그란트라는 독일인이 공성탑을 상대로 그리스의 불을 퍼부었는데, 이 공성탑은 내부는 종탑 형태로 되어 있고 외부는 황소 가죽을 세 겹을 씌운 것이었다. 이 공성탑 때문에 성 로마노스의 탑이 무너졌지만, 방어자들에 의해 금방 수리되어 술탄이 크게 놀라기도 했다.


 성벽을 타고 오르던 오스만 병사들에게도 불벼락이 쏟아졌는데, 이 불행한 영혼들이 고통에 울부짖으며 해자로 추락하는 끔찍한 장면이 묘사된다. 몇몇 병사들은 지상에서도 그리스의 불을 사용했는데, 창 끝에 그리스의 불을 흠뻑 적신 옷가지를 매달아 무너진 성벽 틈새로 들어오려는 적 병사들을 막은 것이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도 오스만 근위병들의 메이스와 채찍은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후열에 늘어선 예니체리들은 도망치는 병사들을 가차없이 베어넘겼다. 이미 화약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던 15세기에도 그리스의 불이 현역으로 활약한 것이다. 제대로 활용되기만 한다면 적 전열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제국 말기 그리스의 불은 제한적으로만 사용되었는데, 동방에서 생산되는 원재료들을 자주 들여올 만한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트로피에 & 이테리에 Syntrophiai & Hetaireiai


 당대의 다른 세력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 역시 많은 수의 용병을 동원했는데, 개중 가장 유명한 예시로 카탈루냐 용병단(Katalanike Hetaireia)이 있다. 당대 베네치아의 기록에 따르면 프랑크인(서유럽인) 치하 그리스나 에게 해의 베네치아 요새들을 지킨 것은 주로 석궁으로 무장한 소규모 용병 수비대였으며, 앙주 가의 알바니아 영지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로마 제국 역시 중앙과 지방 차원에서 점점 더 많은 수의 내-외국인 병력을 고용했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으며, 이는 부대(그리스어 Syntrophiai) 단위로 이루어졌다. 이들 중 대부분은 외국인(Xenoi, 제니)이었지만, 로마인(Rhomaioi, 로메이)도 있었는데 앞서 언급한 파라모네(Paramonai)가 대표적이다.


 용병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로 나뉘었다. 일부는 바랑기 근위대와 같은 종신 계약 용병이었고, 다른 일부는 임시 보충용으로 사태 해결 뒤 해산되는 자들이었다. 용병(Misthophoroi)의 장점은 시기를 불문하고 언제든지 전투에 동원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필요시에만 고용했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해고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물론 종신 계약의 경우는 예외이다) 황제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매우 적었기 때문에 기록에 남은 용병들 중 종신 복무자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급한 필요나 기회가 생겼을 때에만 고용된 자들이었다. 용병들 중 제국에 장기 복무한 자들은 일반적인 군사원정 참여 외에도 황궁 경비, 금문 요새를 포함한 여러 성채 수비에 활용되었다.


 제국이 주로 동원했던 용병들은 황실 근위대인 바랑기를 제외하면 대부분 라틴인들인데, 라틴인이란 곧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에스파냐 지역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용병들 중 가장 수가 많고 강력하며 존중받는 집단이었다. 예컨대 1341년 디디모티콘에서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황제로 선포될 당시, 칸타쿠지노스에게 황제의 상징인 자주색 장화를 신겨 준 것은 그의 가장 가까운 혈족들과 가장 저명한 라틴 용병들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이테리에 제도 아래 징집된 유목민 혹은 반유목민 용병들이 있었는데, 트라키아에 토지를 받고 정착한 알란인들이나 독자 부대와 지휘관을 가지고 참전했던 불가르인, 세르비아인 등이다. 카탈루냐인들은 카탈루냐 용병단 사건 이후에도 발칸 반도 각지에서 용병으로 이용되었는데, 로마 제국(칸타쿠지노스가 언급한 바 있다) 외에도 세르비아 등에서 활동했다. 마지막으로 적지 않은 수의 튀르크인 혹은 튀르크 혼혈인들 역시 용병으로 고용되었다. 개중 일부는 소아시아에서 피난해 온 로마계 피난민들이었지만, 그냥 14세기의 혼란기를 틈타 돈 벌러 온 무슬림들도 있었다.



1. 이테리아 톤 바랑곤 Hetaireia ton Varangon

 1. 1 엥길로바랑기 Ενγλινοβάραγγοι

    위에 있음ㅋ



2. 카탈라니키 이테리아 Katalanike Hetaireia


 비잔티움의 카탈루냐 용병 고용은 127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개중 가장 대규모였던 것은 루지에로 드 플로르의 "대 카탈루냐 동지회"로서 1302년 고용될 당시 기병 1,500명, 알무가바르 4,000명, 기타 보병 1,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지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는 드 플로르를 자만심에 빠뜨렸고, 결국 그는 황제에 적대하기 시작했다. 비잔티움은 병력 규모를 3,000명까지 줄이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드 플로르를 암살했고, 남은 부대원들은 무력을 동원해서 쫓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07년 일부 카탈루냐 용병들이 비잔티움 측에 재고용되기도 했다. 그 뒤 이어진 내전 기간(1321-1357) 동안 병력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고, 이에 카탈루냐인들도 용병으로 동원되기 시작했다. 1352년에는 칸타쿠지노스 측에 고용되어 콘스탄티누폴리스의 금문 성채를 지켰던 카탈루냐 용병 수비대의 존재가 확인된다. 사료에 따르면 그 대장인 후안 데 페랄타는 칸타쿠지노스가 세르비아에 있었을 때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1343년에 두샨을 버리고(혹은 두샨이 보내서) 1350년대까지 칸타쿠지노스 편에 가담했다는 용병들 역시 이 카탈루냐 용병대일지 모른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들은 요안니스 5세의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는 역할과 동시에 칸타쿠지노스가 도시를 확고히 장악하게 만드는 역할도 담당했다.



2-1. 알무가바르 Almughavars

다른 이름 : 알모가바리 Almogavaroi


 알무가바르들은 아라곤 왕국의 군사들 중 가장 유명한 자들이다. 이들은 아라곤과 카탈루냐가 위치한 피레네 산맥의 깊숙한 계곡들에서 태어났으며, 워낙 사나운 전사들이라 "파괴자"라는 뜻의 알무가바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갑옷을 입지 않은 대신 엄청난 민첩성을 자랑했으며, 그 교활함과 대담함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들이 던지는 투창은 가장 좋은 갑옷조차 뚫어버릴 정도로 위력적이었으며, 그 덕에 경무장병임에도 불구하고 큰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 알무가바르들의 대표적인 무기는 너무 길어서 근접전에서는 짧게 꺾어서 써야 했을 정도로 긴 창인 "coutell"과 갑옷 입은 사람조차 일격에 죽일 수 있는 2~4개의 강력한 투창이었다. 숙련된 알무가바르는 이 무기들을 써서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여주는데, 알무가바르 한 명이 중무장한 적 다섯 명을 해치운 경우도 있을 정도다. 우선 두 명은 투창으로 처리하고, 다른 두 명은 투창과 창으로 말을 찔러서 낙마시키고, 마지막 하나는 돌을 던져 무력화시켰다는 것이다. 비록 얼마 전 카탈루냐인들이 제국에 엄청난 피해를 끼치긴 했지만, 그들의 전사로써의 탁월한 능력은 물론이요 가까운 아테네와 시칠리아 지역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 역시 잊혀지지 않았다. 갑옷 없이 로마식의 투창 두어 개와 찌르는 칼로 무장한 이 병사들은 로마 제국에게 매우 유용한 병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2. 알무가바르 장창병 Almughavar Long Spearmen


 알무가바르들은 대개 이베리아의 기독교 왕국들과 무어 왕국들 사이의 산악 변경 지대, 숲, 시골 등지에 살던 농부 혹은 목자 출신이었다. 그들이 살던 곳은 쓸만한 자원이 거의 없는 가장 황량한 산악지대였다. 이들은 자급자족을 위해 강도떼가 되어 무어 영역에 깊숙이 침투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재정복(Reconquista)에 참여하는 전사집단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대규모 군대를 이루었고, 아라곤의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와 튀니지에서 군사 원정을 벌였을 때 그 휘하에는 15,000명의 알무가바르가 있었다. 시칠리아의 만종으로 벌어진 전쟁 이후 많은 수의 알무가바르들이 용병대를 결성하여 이탈리아의 구엘프 파 군대나 아나톨리아의 비잔티움 군대에 가담했고, 일부는 카탈루냐 동지회를 결성했다. 알무가바르 창병들은 양손으로 잡는 긴 장창을 주로 사용했다. 다른 창병들과는 달리 이들은 기병을 상대할 때 말을 주로 노렸고, 낙마한 상대 기사를 손쉽게 처리했다. 이들은 장창을 사용하며 비슷한 대형을 짜긴 했지만, 후대에 등장하는 장창병(pikemen) 대열처럼 단단한 전열을 이루지는 못했으며 전투가 격화될 경우 진형이 흐트러지곤 했다. 이들은 투창병에 비해서 기동성이 떨어졌으므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사슬 갑옷을 입어 방어력을 높였다.



2-3. 알포라트 Catalan Alforrats


 알포라트는 카스티야의 히네테(jinete)와 유사한 아라곤 고유의 경기병 부대이다. 이베리아에서 경기병 전술은 무어인의 정복 이후 알려지기 시작했고, 아라곤은 재정복 과정에서 이를 도입했다. 무어인들의 대규모 기병대를 상대하기 위해 형성된 알포라트 기병들은 재정복 전후 시기를 통틀어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알포라트들은 히네테에 비해 한층 더 범용성이 뛰어났는데, 가죽, 사슬, 미늘 갑옷 혹은 더 무거운 갑옷도 사용하는 등 중무장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작은 원형 방패를 들고, 무기로는 랜스나 투창을 썼다. 따라서 적 전열을 교란시키는 경기병 역할 이외에도 중기병을 지원하거나 적 기병을 상대하는 중급 기병(medium cavalry) 역할도 담당할 수 있었다. 알포라트는 주로 이베리아의 아라곤 군대에 많았지만 이탈리아에 있는 시칠리아군, 혹은 로마니아에 있는 아테네 공국 혹은 용병대에서도 볼 수 있었다.



2-4. 카탈루냐 기사대 Catalan Knights


(갑옷 업그레이드)


 Cavalls Armats, 즉 아라곤의 카탈루냐 기사들은 프랑스나 다른 서유럽 기사들과 거의 다를 것이 없는 경험 많고 중무장한 기사들이다. 이베리아의 재정복 당시 이 카탈루냐 기사들은 무슬림 타이파들에 대한 공격의 최선봉에 있었다. 1237년 Puig 전투에서는 보병의 지원을 받은 소수의 카탈루냐 기사들이 무슬림 대군을 무찌르고 발렌시아를 정복하기도 했다. 이베리아에서 아라곤의 영역이 확고해지자, 아라곤 군대와 카탈루냐 용병들은 시칠리아의 만종 이후 벌어진 1282년~1302년 사이의 전쟁에도 가담했다. 카탈루냐 기사들은 앙주 군대와 여러 차례 싸웠고, 시칠리아에서 그들을 몰아내고 아라곤이 왕권을 세우는 것을 도왔다. 시칠리아의 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리스와 소아시아로 이동했고, 경무장한 알무가바르들을 대동한 카탈루냐 기사들은 이번에는 비잔티움을 도와 튀르크인, 십자군 세력들과 싸웠다. 비잔티움으로부터 배신당하자 카탈루냐인들과 아라곤인들은 비잔티움과 싸워 이기고 그리스 남부로 갔다. 1310년 알미로스 전투에서는 소수의 카탈루냐 기사들과 알무가바르들이 중무장한 프랑스 기사들을 격파하기도 했다. 오늘날 카탈루냐 기사들은 아라곤, 시칠리아, 그리고 그리스 남부의 아테네 공국과 네오파트리아 공국에서 볼 수 있다. 단 과거와 마찬가지로 용병대로서의 성격 역시 남아 있기 때문에, 높은 보수를 지불할 수 있다면 로마니아와 지중해 연안 각지에서 이들을 용병으로 고용할 수도 있다.



3. 스키씨키 이테리아 Skythikoi Hetaireia


 쿠만인들은 11세기 말기부터 비잔티움 군대에 징집되기 시작했으며, 14세기까지 군대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이들 중 특히 중앙군에 소속된 이들은 "스키씨콘(Skythikon)"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원래 페체네그인 병사들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었다. 1241년 요안니스 3세는 최대 10,000명에 달하는 자들을 군사 식민자로 트라키아와 아나톨리아에 정착시켰고, 이들은 1292년 혹은 그 이후까지 유럽 방면의 원정에 동원되었다. 이들은 그 뒤 완전히 그리스화되었는데, 심지어 안드로니코스 2세 시대에는 그리스어를 쓰는 쿠만인이 메가스 도메스티코스의 지위에 오를 정도였다. 1320년대의 쿠만인 용병 부대는 세르비아의 스테판 우로스 2세가 미하일 9세(1294-1320년 사이 공동황제)에게 빌려 준 보조군 부대에서 유래했는데, 안드로니코스 2세와 그의 손자인 안드로니코스 3세 사이에 내전이 임박한 상황에서 매우 유용한 병력이었기 때문에 반환되지 않고 남았다. 이들은 세르비아 측의 반환 요구에도 불구하고 트라키아 지역에 재정착되었는데, 남쪽의 로마령 트라키아와 북쪽의 불가리아인들과 몽골인들 사이에 완충 지대를 형성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안드로니코스는 그들이 몽골인들과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고, 1327년 그들을 트라키아에서 렘노스, 타소스, 레스보스 등으로 이주시켰다. 쿠만인들이 "스키씨콘" 병사들의 주류이긴 했지만 다른 종족 병사들도 있었는데, 예컨대 알란인들이 그렇다. 알란인들은 1301년 최대 16,000명 단위로 비잔티움 측에 고용되었는데 그 중 절반이 전사였다. 카탈루냐 동지회 사건 이후 1306년 대부분의 알란인들은 불가리아로 넘어갔지만 일부는 비잔티움에 남기도 했다. 그 외에 불가르인, 세르비아인, 블라흐인, 마자르인 등도 있었다.



3-1. 스키씨키 이포톡소테 Σκυθικοί Ιπποτοξόται

스키씨키 이포톡소테 Skythikoi Hippotoxotai


 "스키씨콘" 부대의 기병들은 전원 경무장한 궁기병이었다. 대개 스텝 지역 출신인 이 전사들은 튀르크인 궁기병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위력적인 병력이었으며, 야전군 편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전력이었다. 소위 "스키타이식 활"이라고 불렸던 소형 합성궁을 무기로 썼다.



3-2. 스키씨키 톡소테 Σκυθικοί Τοξόται

 스샷 없음ㅋ


 "스키씨콘" 부대의 대부분은 기병이었지만, 개중 가난한 일부는 보병으로 참전하기도 했는데 대부분 궁병이었다. 가벼운 사슬 갑옷과 작은 방패, 짧은 칼과 활로 무장했다. 사격전에서는 그리스인 궁병들보다 특별히 나을 것도 없었지만, 그 대신 근접전에서는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었다.



4. 라티니키 이테리아 Latinike Hetaireia


 귀족들 사이의 분열, 특히 반복되는 내전과 교회 통합 문제 등을 둘러싼 해묵은 갈등 때문에 황제는 점점 더 외국인 용병과 용병대에 의지하게 되었다. 외국 군인들과 그들에게 둘러싸인 황제는 비잔티움 말기 군대의 기본 요소가 되었다. 서유럽 출신의 라틴 용병대(라티니키 이테리아)는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용병 집단 중 하나였으며 이탈리아인, 독일인, 카탈루냐인, 프랑스인, 에스파냐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라틴인들은 완전히 군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부가 되었으며, 다름아닌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본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을 1341년 디디모티콘의 황제 즉위식에서 알 수 있다. 새 황제에게 자주색 장화를 신기는 상징적인 행사에서 이 역할을 맡은 자들이 바로 황제의 가장 가까운 혈족들과 가장 저명한 라틴 용병들이었던 것이다.


 과거에는 라틴인 병사는 거의 없었고 대신 튀르크인 용병(아마도 투르코풀리 Tourkopouloi)이 있었는데, 이들은 1263년 모레아 원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 동안 외국인 용병들의 구성이 상당히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미하일 8세는 군인들을 아끼고 사랑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여기에는 라틴 용병들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의 치세에 라틴 용병들의 중요성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미하일 8세의 후계자인 안드로니코스 2세 역시 1292년 유럽 원정에서 튀르크인과 쿠만인들을 더 선호했으며, 나중에 카탈루냐 용병대를 고용한 것을 보면 그 시점에선 이미 용병으로 고용할 만한 라틴인들이 많이 남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뒤로 내전이 발발하자 국내외의 전쟁을 동시에 감당하기 위해 세르비아인, 불가리아인, 튀르크인 등의 동원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고, 라틴 용병 역시 다시 출현했다. 주로 중장기병이었던 라틴 용병들은 내전에서 서로 대립하는 세력 양측에 모두 고용되었으며, 당대의 정예 병력으로 간주되었다.



4-1. 라티니키 이피스 Λατινικοί Ιππείς


(갑옷 업그레이드)


라티니키 이피스 Latinikoi Hippeis


 라티니콘 포싸톤(라틴인 부대)은 최신 판금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랜스, 방패, 장검을 갖추어 공격과 방어 모두 흠잡을 데가 없다. 여기에 튼튼한 마갑까지 갖춘 이들은 제국의 가용 전력 가운데 가장 최신식이고 가장 중무장한 기병대이다.



4-2. 라티니키 페지 Λατινικοί Πεζο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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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용병들은 시민 혹은 하류 귀족 계급 출신으로, 부유한 귀족들처럼 엄청나게 중무장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슬 갑옷에 흉갑, 작은 서구식 삼각 방패에 장검 등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다. 잘 훈련되고 사나운 이 병사들은 공격에 적합하지만, 상황이 나빠지면 슬슬 발을 빼려고 할 것이다.



4-3. 라티니키 스코페프테 Λατινικοί Σκοπευταί


(갑옷 업그레이드)

라티니키 스코페프테 Latinikoi Skopeutai


 로마 제국은 화약 무기를 상당히 늦게 받아들인 편이다. 서유럽에서 처음으로 전쟁에 화기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1320년대이고, 14세기 중반이 되면 아드리아 해안가의 도시들과 헝가리에서도 화기를 쓰기 시작했다. 세르비아에서는 1386년에 나타났고,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가 되면 남쪽으로 베네치아령 모레아에 이르기까지 아드리아 해 동부의 거의 모든 도시들에서 화기가 쓰였다. 비잔티움 기록에서는 소화기, 특히 머스킷을 가리킬 때 "납 발사기(molybdobolon)"라고 쓰거나, 혹은 이탈리아어 "sclopo", "schioppo", "skopeta(schioppetta, "때리다"라는 동사에서 유래)" 등을 그리스어로 음차해서 표기했다. "touphax"라는 표현도 있었는데, 파이프 모양의 화기를 가리키는 튀르크어 "tufenk"에서 유래한 것이다.


 로마인들은 베네치아와 제노아를 통해 이런 소화기들을 구했다. 또 제국의 도시에 사는 몇몇 이탈리아 상인들은 자기 이권을 지키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용병(대개 전직 해군 선원이나 해병)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이 용병들은 대개 가능한 한 최신식 무기를 구해다 썼고, 물론 그 사용법도 잘 알았음이 분명하다. 새로 개발된 핸드건이나 아르퀘부스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기타 병종

 이 다음에 나오는 유닛들은 앞서 나열한 병종 구분에 포함되지 않는 유닛들이다. 장군 호위대, 기타 팩션 로스터에 포함되지 않은 유닛, 예컨대 이웃한 팩션들과 공유하는 보조병이나 지역 용병들로써 현 로마 제국 프리뷰에 포함되지 않은 유닛들이다.


1. 이키이 Οικείοι


(갑옷 업그레이드)

이키이 Oikeioi


 유력자들, 지도자들, 장군들, 지휘관들 대부분은 유력 귀족 가문에 속해 있으며, 그들이 원정에 나설 때는 이키이(Oikeioi)와 이키테(Oiketai)를 동반한다. 물론 가장 많은 수의 이키이와 이키테를 거느린 것은 황제이며, 황제 휘하에 있는 자들은 안쓰로피 투 바실레오스(Anthropoi tou Vasileos, 직역하면 '황제의 사람')라고 불린다. 이키오스(Oikeios)란 친척과 친지들, 즉 유력자의 혈족과 가장 친한 친구들을 말하며, 고용 관계가 아니라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관계로 맺어진 동료들이다. 유력자가 이 동료들을 사적으로 부양하기도 하지만 이는 가족적, 사회적 의무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고 대개는 동료들도 자기들 나름대로 재산이 있다. 반면 이키테는 유력자의 직속 부하와 시종들이다. 유력자는 자비를 들여 그들을 부양하는 대신 전쟁시 직속 부하로 동원하거나 가내 시종으로 부리므로, 이는 생업이 달린 고용 관계이다. 이키이와 이키테를 거느린 지도자가 높은 사람이라면 이키이와 이키테가 합쳐 대규모 수행단을 이루는데, 이 경우 각 이키오스와 이키테스의 서열과 위치, 담당 업무는 확실하게 나뉘어진다.


 사회적으로 매우 높은 위치에 있는 이 유력자들은 제국에서 가장 좋은 장비로 무장한다. 심지어 말에 철제 마갑을 사다 입힐 정도다. 이들의 갑옷은 사슬, 미늘, 라멜라 등을 여러 겹 겹쳐 만든 두꺼운 것으로, 과거의 카타프락티에 비견되는 최고의 중장기병이라 할 수 있다. 가능하다면 최신 기술을 이용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맞춤형 판금 갑옷을 주문할 수도 있다. 돌격시에는 서구식 랜스를 쓰지만, 근접전에서는 큰 방패와 함께 메이스를 더 선호한다. 이들은 로마군의 최정예(logades)로써 지도자를 위해 최후의 1인까지 맞서 싸울 것이므로 함부로 상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들은 적의 공격을 막는 최후의 보루이며, 비록 비싸고 굼뜨긴 하지만 제대로 활용된다면 전장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을 것이다.



2. 투르코풀리 Τουρκόπουλοι

투르코풀리 Tourkopouloi


 1321년에서 135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제국은 소아시아의 모든 영토를 잃었다. 그 결과 아나톨리아 출신 피난민 무리가 유럽 지역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었고, 특히 트라키아는 인구가 급증했다. 이 피난민들 중에는 그리스-튀르크 혼혈 집단도 있었는데, 이 혼혈인 출신 전사들은 "페르시키 스트라티오티키 카탈로기(Persikoi Stratiotikoi Katalogoi, 튀르크인 군인 명부)"에 등록되었다. 파히메리스는 비잔티움령 아나톨리아 출신자들은 튀르크인들과 어울리기 위해 그들과 마찬가지로 머리를 밀었다고 썼다. 튀르크 부족들과의 오랜 상호작용은 로마인들의 전투 방식, 생활 양식, 의복, 언어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3. 알바니아 경기병 Albanian Light Cavalry


 아르바니테스 혹은 아르베레셰라고도 알려진 알바니아인들은 발칸 지역에서 여러 개의 작은 공국들을 형성했으며, 사나운 족장들이 그들을 이끌고 있다. 1271년 나폴리의 앙주 세력이 알바니아를 정복하고 왕국을 칭한 뒤로 그들의 군대에서 알바니아인들을 징집했지만, 모레아나 이피로스 등 발칸 서부의 다른 지역들에서도 알바니아인 병사를 볼 수 있었다. 알바니아인들은 부족장 단위로 산산히 쪼개져 자기들끼리 극심하게 반목했으며, 경쟁 부족장을 몰아내기 위해서라면 외국의 적들과도 손을 잡을 정도였다. 알바니아의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온 이들은 지형을 이용한 기습 전술을 발전시켰다. 알바니아 병사들은 대부분 경기병으로 랜스나 칼, 세이버 혹은 zagaie라고 불리는 무기를 썼는데, 이 무기는 길이 10-12피트 정도에 양 끝에 칼날이 달려 있었으며 오버암 방식으로 사용했다. 챙 달린 큰 모자를 쓰고 행잉 슬리브(hanging sleeve) 스타일의 옷을 입었는데, 옷 색상 중 가장 인기있었던 것은 진홍색(주로 귀족들), 붉은색, 초록색, 파란색 등이다. 이 기병들은 치고 빠지는 전술로 적들을 괴롭혔는데, 오스만 제국 등 훨씬 강대한 적을 상대로 뛰어난 전과를 거두어 이후 스트라디오트 부대 창설의 기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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