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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 Conflicts - 로마 제국 프리뷰 게임

이미지 압박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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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독일사는 잘 모릅니다.

사실 영어도 잘 모릅니다

로마 제국 IMPERIUM ROMANUM



제국의 국호에 대하여 :
1. 로마인 Romanitas
 "Nostrum est Romanum Imperium" - 라임스(랭스)의 게르베르트

 "우리 나라는 로마 제국입니다" 게르베르트가 오토 3세에게 이렇게 말했을 때, 서로마 제국이 그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멸망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는 동프랑크 왕국의 왕들이 재건된 로마 제국의 적법한 황제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가끔은 동방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Romanorum"을 빼기도 했지만, 그들은 라틴어 칭호 Augustus와 Imperator Romanorum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사실 서구인들이 보기에 최고 주권(Imperator)을 주장할 권리는 특정한 민족이나 지역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사실 제국(Imperium) 역시 엄밀한 조건 없이 그냥 제국이었다. 그 때문에 동프랑크 왕들은 Imperator Romanorum 외에도 Imeprator Francorum이라고도 불렸던 것이다. 966년 오토 대제는 아예 Imperator Augustus Romanorum ac Francorum이라고 기록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들은 상호 교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별개의 개념이었다.

 '로마 제국'이라고 할 때, 그 개념은 크게 세 차원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첫째는 이탈리아 반도의 정치체, 둘째는 다른 왕국들을 복속시킨 거대한 제국, 셋째는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당대 서방의 학자나 정치가들이 로마 제국을 언급했다면, 이 세 경우 중 어떤 것도 해당될 수 있다.

 많은 당대인들은 오토를 과거의 '카이사르'들의 후예로 여겼으며, 이후 동프랑크 왕들은 그 경향을 더욱 강화시켰다. 오토 대왕의 손자이자 동로마의 공주 쎄오파노의 아들이었던 오토 3세는 아예 그의 치세에 로마 제국의 부활을 선언한다. 그의 스승이었던 게르베르트는 그 사상을 더욱 강화시켰다. 흥미롭게도, 게르베르트는 오토 3세의 제위 등극을 정당화하는 이유 중 하나로 그가 'Homo genere Grecus'라는 점도 들고 있다. 그의 '그리스 혈통'이란 물론 동로마의 공주인 어머니 쎄오파노를 말하는 것이다. 오토 3세는 로마의 황제로써 옛 로마의 여러 속주들을 다스렸다.
(Nostrum est Romanum Imperium. Dant vires ferax frugum Italia, ferax militum Gallia et Germania, nec Scithae desunt nobis fortissima regna.)

 콘라트 2세의 즉위 이후, Imperium Romanum이 그들이 다스리는 제국의 보편적인 명칭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서부의 프랑크인/프랑스인 기록자들은 동프랑크 왕국을 더 이상 프랑크라고 기록하지 않았다. 그 대신 로마, 혹은 별로 놀랍지는 않지만, 색슨이나 게르만으로 쓰게 된다.


2. 프랑크인, 색슨인, 게르만인
 "Exhinc quidam post Francorum Regnum supputant Teutonicorum" - 프라이징의 오토

 'Nomen Imperatoris'로 인해 프랑크 왕국의 동부와 서부가 완전히 결별하긴 했지만, 사실 그 전에도 두 지역은 비단 정치 뿐 아니라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분열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서로 사용하는 언어도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10세기 초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면서 또 다른 연결고리가 하나 끊어지게 된다.

 Teutonicus라는 용어는 이미 9세기부터 쓰였고, 10세기 이후에는 Teutones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원래는 Theodiscus였지만, 이는 야만적이라고 여겨져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다. 이는 특히 중세 학자들의 못된 버릇 중 하나인데, 고대에 쓰였던 이름들을 가져다가 비슷해 보이는 족속들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쓰는 것이다. 그래서 덴마크인들은 Daci가 되고, 스웨덴인들은 Suevi가 되곤 했다.

 하지만 Teutones라는 용어 자체는 대개 학자들의 전유물로 남았고(이유는 조금 다르지만 이탈리아인들도 이를 즐겨 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센, 바이에른, 프리지아 같은 자신들의 지역적 정체성을 선호했다. 헷갈리게도, 작센(색슨)은 아예 동프랑크 왕국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919년부터 작센 출신 왕들이 생겼다는 이유 때문이다.

 사람들이 정확히 언제부터 '프랑크인'이라는 정체성을 포기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프라이징의 오토가 'Regnum Francorum'이 'Regnum Teutonicorum'으로 변경된 것이 하인리히 1세 시대라고 한 것이 유명하지만, 그는 당대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Rex Teutonicorum'이라는 칭호는 한번도 공식적으로 쓰인 적이 없으며, 대개 정적들이 그의 지위를 지방 군주 수준으로 깎아내리기 위해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

 어쨌건, 1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 왕국의 공식 국호에서 '프랑크'가 삭제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 TGC가 다룰 시대 배경(872~1071)에서, 왕국은 더 이상 '프랑크 왕국' 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상태이지만, 동시에 아직 '독일'도 아닌 상황이다.


919년~1076년 사이의 역사
(이탈리아와 제국 남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왕(REX) 하인리히 1세의 인장, 927 AD

 918년, 콘라트 1세의 지배는 파국을 맞고 있었다. 동프랑크 왕국의 대 공작들은 노골적으로 그를 무시했고, 마자르인들을 위시한 이민족들이 마음대로 영토를 약탈했다. 콘라트가 죽자 공작들은 '새 사냥꾼' 작센 공 하인리히를 새 왕으로 뽑았다. 하인리히는 콘라트처럼 공작들에 대한 직접 통치를 시도하는 대신, 상위 군주로서의 느슨한 통제에 만족했다. 다른 공작들에 대한 하인리히의 권한은 대개 군사적 지휘권에 국한되었지만, 그 결과 왕국의 정치는 상당히 안정되었다. 대 공작들은 왕의 친구(amici)로서, 왕과 동등한 입장으로 취급되었다.

 하인리히 1세 시대의 가장 큰 위협요소는 마자르인들이었다. 마자르인들의 침략을 막아 보려는 이전 왕들의 시도는 허망한 실패로 끝났고, 그 결과 왕권은 더욱 위축되고 불안정해졌다. 하인리히는 그가 아직 적과 맞서 싸울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잘 알았다. 그의 군대가 제대로 싸울 만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만약 적과 싸워서 패배한다면 왕의 위신은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실추될 것이 뻔했으므로, 그는 단 한 차례의 실패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인리히는 마자르인들에게 돈을 주고 평화 협정을 맺는 편을 택했고, 협정 기간 동안 군대를 개혁하고 국경 지대를 요새화했다. 전략적 요충지에는 성을 쌓고, 도시들은 물론 마을들까지 성곽을 둘러쳤다. 중장기병의 숫자가 증강되었으며, 보병들 역시 더 효율적으로 훈련되기 시작했다.

 마자르인들을 상대하기 전, 하인리히는 동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슬라브인들의 영역을 먼저 침공했다. 하인리히는 여러 부족들을 정복했지만, 공작들을 상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복종을 받는 수준에 만족하고 그들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다. 원정의 목적은 여러 가지였을 것이다. 마자르인들을 상대하기 전에 먼저 측면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고, 하인리히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입증하기 위함이거나 혹은 병사들에게 실전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원정의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하인리히는 전쟁 준비를 마쳤다.

 하인리히는 마자르인 사신들이 새 공물을 요구하기 위해 찾아오자 그들의 발치에 (아마도 죽은) 개를 집어던진 뒤에 쫓아내 버렸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933년 하인리히는 리아데 전투에서 마자르인들을 상대로 첫 대규모 승리를 거두었다. 비록 전투에서 마자르인들이 직접적으로 입은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패전으로 인해 다른 마자르 군대가 작센과 투링겐 지역에 고립되고 말았다. 대규모의 방어시설과 궂은 날씨로 인해 침입자들의 현지 보급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들은 독일 영토에 지나치게 깊숙히 들어왔고, 막 승리를 거둔 하인리히의 군대가 추격을 시작했기 때문에 후퇴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결국 마자르인들은 굶어 죽거나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선대 왕들과 달리, 하인리히는 서방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서방과 조약을 맺으려 하기는 했지만, 분열된 프랑크 왕국을 통합하겠다는 시도는 완전히 포기한 것이다. 하인리히는 오늘날의 독일 지역에 관심을 집중했고, 이 때문에 그는 '최초의 독일인'이라는 찬사를 자주 받는다. 특히 나치가 이 '최초의 독일인'에게 호의적이었는데, 물론 그것이 하인리히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죽기 직전 하인리히는 로마로의 여정(Romfahrt), 즉 로마로 가서 교황으로부터 대관식을 받아 황제로 즉위하고 이탈리아를 지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곧 몸져누웠고, 건강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진 끝에 결국 935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죽기 바로 전 해, 하인리히는 공작들을 모아 놓고 그의 아들 오토를 다음 왕으로 세우도록 했다.



황제(IMP. AVG.) 오토 1세의 인장, 962 AD 이후

 오토 1세는 936년 2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의 재위 초창기는 골육상쟁으로 얼룩졌으며, 공작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해 벌어진 내전은 5년을 끌었다. 오토는 내전에서 승리했지만, 가족과 친척들을 유력자들과 결혼시키는 혼인 동맹으로 지지 세력을 굳혔다. 그는 서부 국경에서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 세력을 막아내고, 데인인들과 슬라브인들의 침입도 저지했으며, 마자르인들을 상대로도 평화를 유지했다.

 오토는 남동쪽으로 눈을 돌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와 접촉했다. 오토 1세와 콘스탄티노스 7세는 외교적으로 우호적인 입장을 교환했고, 오토는 또다시 혼인 동맹을 이용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와의 우호 관계를 이용해 오토는 이탈리아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고, 951년 참칭자 베렝가르를 무찌른 뒤 롬바르드인의 왕으로 즉위했다. 별 일이 없었다면 오토 1세의 이탈리아 진공은 계속되었겠지만, 본토에서 그의 친아들이 주도하는 반란이 터지고 말았다.

 오토 1세의 외아들인 리우돌프는 아버지가 재혼하는 것을 보고, 새어머니에게서 난 아들이 자신의 후계자 지위를 위협할 것을 걱정했다. 리우돌프는 로트링겐 공작 '붉은 콘라트' 등의 유력자들과 동맹을 맺고, 새어머니가 실제로 아들을 낳은 것이 알려지자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리우돌프는 심지어 마자르인들과 결탁하여 954년 그들이 바이에른에 쳐들어오도록 하기도 했다. 왕국이 완전히 둘로 쪼개질 상황에 처하자, 주교들이 나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화해하도록 주선했다. 그 때문에 잠시 지체되기는 했지만, 결국 가을이 되자 내전은 종결되었다.

 이제 남은 건 마자르인들 뿐이었다. 오토는 바이에른을 구원하기 위해 보헤미아를 포함한 모든 공작령에서 군대를 소집했다. 이 과정에서 오토는 자신 직속의 영지인 작센을 무방비 상태로 두는 위험을 감수했고, 이를 본 공작들은 왕이 자기 봉신의 안전을 진정으로 염려한다는 신뢰감을 갖게 되었다. 레히펠트 전투(상세한 경과는 아래 참고)에서 오토는 마자르인들을 살육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한때 오토의 가장 강력한 적이었던 콘라트는 이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워 승리를 주도했지만, 지쳐 쉬던 중 그만 전사했다. 마자르인들의 피가 흐르는 땅을 밟고 선 오토의 병사들은 고대 로마의 전통에 따라 '임페라토르'에게 환호를 보냈다.

 전투 직후 슬라브인들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곧 진압되었고, 그 뒤 당분간 슬라브인들은 잠잠해졌다. 오토는 그 이후의 평화로운 시기를 교회를 재조직하는 데 보냈다. 이는 교회에게 더 많은 영지와 특권을 주는 대신 더 많은 궁정 업무를 부과하고, 물론 그 결과로 왕권에 대한 지지를 강화시키는 작업이었다.

 오토의 병사들은 그를 '임페라토르'로 여겼지만, 아직 오토는 정식 황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때마침 완벽한 기회가 찾아온다. 베렝가르 2세라는 참칭자가 북이탈리아의 상당 부분을 정복하고 로마를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탈리아의 여러 주교들이 독일로 피신해 왔고, 교황이 원조를 요청하기에 이르자 마침내 오토는 때가 왔다고 여기고 961년 이탈리아로 갔다.

 베렝가르는 철수했고, 오토는 962년 대관식을 치른다. 로마의 실권을 쥐게 된 오토는 교황 선거 방식을 재조정했고, 이를 포함한 다른 몇 가지 이유들 때문에 교황 요한 12세는 오토를 적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요한 12세는 로마 시민들과도 척을 졌고, 머지않아 쫓겨났다. 이후 얼마간의 실랑이 끝에 오토 1세와 새 교황 레오 8세는 로마를 포함한 중부, 북부 이탈리아를 확실히 장악한다.

 오토 1세는 남쪽으로 확장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니키포로스 포카스 황제와 대립하기도 했지만, 승패가 불분명한 몇 차례의 충돌 이후 양자는 서로 동맹을 맺는 편이 더 이득이 되리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복잡한 외교적 사정 때문에 공식적인 평화 협정의 체결은 상당히 지체되었고, 결국 포카스가 죽고 나서야 동맹이 체결되었다. 오토의 아들 오토 2세는 요안니스 치미스키스의 조카 쎄오파노와 결혼하고, 두 황제는 서로 불필요한 도발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요안니스는 오토가 (황제가 아닌) 일개 왕이라는 태도를 버리고, 오토는 요안니스를 상대할 때 자기의 황제 직함에서 'Romanorum'을 빼는 등이다.

 오토 대제는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왕위에 올랐지만, 당대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그의 '로마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973년 그가 사망할 당시 서방의 로마 제국은 동방의 로마 제국과 맞먹을 수 있는 당당한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오토 2세와 쎄오파노의 결혼, 상아 명판, 962 혹은 963 AD

 오토 2세는 이미 967년부터 공동황제로 즉위해 있었지만, 973년 제위를 완전히 계승한 그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공작들 사이에는 심각한 마찰이 일었고, 데인의 왕 푸른이빨 하랄드가 북방을 침입했으며 카롤링거 세력의 동태도 심상치 않았다. 카롤링거 세력의 위협은 특히 심각해서 오토 2세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파리를 포위해야 할 정도였지만, 그의 진짜 목표는 이탈리아였다.

 그는 자신이 로마 황제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자신이 이탈리아 전체를 지배해야 한다고 믿었다. 물론 그 범위에는 이슬람 세력, 롬바르드인들, 동로마 제국이 차지하고 있는 남이탈리아도 포함되었다. 982년 오토가 남이탈리아에 침입했을 때 기독교인 주민들의 반응은 그리 적대적이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은 혼란에 빠져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거의 상실했고, 롬바르드인들은 오토의 동맹이었던 '무쇠 머리' 판둘프가 죽은 뒤 자기들끼리 싸우기 바빴으며, 이슬람 세력의 약탈은 더욱 심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오토의 원정은 콜로나 곶에서 벌어진 파멸적인 전투로 막을 내렸지만(상세한 사정은 아래 참고), 이슬람 세력의 약탈은 멈췄다.

 패전 이후 벌어진 슬라브인들의 반란은 심각한 위협이 되었고, 오토는 북동 지역의 영토를 상당 부분 잃었다.

 오토는 뛰어난 잠재력을 보였지만, 그 잠재력을 꽃피워 보지 못한 채 28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로마에 묻힌 최초이자 최후의 독일인 군주가 되었다.



게르마니아, 로마, 갈리아, 슬라베니아의 복종을 받는 오토 3세, 오토 3세의 복음서, 1000 AD 전후

 오토 2세의 아들, 오토 3세는 독일 역사에서 가장 화려하며, 가장 논란이 많은 군주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는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즉위한 군주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데, 부황이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세 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우선은 모후인 쎄오파노와 궁정 대신들이 섭정을 맡았지만, 오토 3세는 14세가 된 뒤 친정을 시작했다.

 두 로마 제국의 혈통을 동시에 물려받은 그는 곧 자신이 진정한 로마인으로써 이탈리아를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동로마의 황녀와 결혼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995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신을 파견한 뒤, 로마를 향한 첫 여정(Romfahrt)을 떠났다.

 로마에서는 교황 요한 15세가 로마 시장(Urban Prefect) 크레센시오가 주도하는 귀족들과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고, 교황은 오토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오토 3세는 우선 베네치아 도제의 아들인 오토 오르세올로의 대부가 되어 베네치아와 우호 관계를 맺은 뒤, 남쪽으로 진군하여 크레센시오를 격파했다. 하지만 요한 15세는 이미 죽은 뒤였고, 오토는 자신의 권력을 동원하여 첫 독일인 교황인 그레고리오 5세를 즉위시켰다. 오토 3세는 자신이 세운 교황의 손으로 대관을 받았고, 그레고리오는 화해의 뜻으로 크레센시오를 사면했다.

 그러나 크레센시오는 오토가 슬라브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떠나자마자 곧바로 대립교황을 세웠고, 그레고리오를 로마에서 추방했다. 998년 돌아온 오토는 로마를 포위했고, 로마 시민들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크레센시오와 그의 대립교황에 대한 지지를 거부했다. 둘은 오토에게 붙잡힌 뒤 고문당해 죽고, 오토는 로마에 입성했다.

 999년 그는 유명한 'Renovatio Imperii', 즉 로마 제국의 재건이라는 선언이 담긴 첫 인장을 발행했다. 그는 팔라티누스의 황궁에 머무르면서 여러 로마식 관직을 만들었는데, 그 중 하나가 Praefectoria Navalis, 즉 제국 해군 사령부이다. 하지만 사실 당시에 제국 해군 같은 건 없었다.

 오토 3세는 북동쪽 변경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해 슬라브 접경 지역에 새 관구를 만들고, 그 지역의 공작인 볼레스와프를 그와 동등한 위치로 승격시켰는데,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오토는 볼레스와프를 Frater et Cooperator Imperii (제국의 형제이자 조력자)이자 Populi Romani Amicus et Socius (로마 인민의 친구이자 동맹자)로 대했는데, 오토의 후계자들은 이 같은 오판의 대가로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어쨌든 당시의 오토는 그 정도의 대처로 만족했고, 서둘러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1000년에서 1001년 사이 그는 별다른 통치 행위를 하지 않고 황제로써의 삶을 만끽한 것 같다. 티볼리가 반란을 일으키자 오토는 도시를 포위했고, 이는 로마 시민들의 반감을 샀다. 오토는 이 반감을 무마하기 위해 로마 시민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로마를 사랑하는지 일장연설을 했다. 로마 시민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고 하니 그 연설 내용이 매우 감동적이었던 것 같다. 한편 오토는 교회로부터 소위 '콘스탄티누스의 기부장'에 근거한 도전을 받기도 했는데, 그는 기존의 전례를 들어 이를 묵살했다.

 1002년 1월 오토는 병에 걸려 불과 22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치세를 대개 낭만적인 환상에 사로잡힌 황제가 이탈리아 지역에 정력을 낭비하는 바람에 알프스 이북 독일 지역의 정치 상황을 악화시켰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그의 로마 제국 재건이라는 낙관적이고 원대한 야망, 그의 높은 교육 수준(그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모두 능했으며 여러 고전을 섭렵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 또래에 그 같은 학식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자기 주장을 가진 점에 끌리기도 한다.



하인리히와 주교들, Seeon 주교의 세밀화에서, 1007-1024

 오토 3세 사후 독일 공작들은 오토 가문의 바이에른 쪽 방계 출신인 하인리히 2세를 다음 황제로 선출했다. 하인리히는 그 자신이 바이에른 공작이기도 했으므로 오토에 비해서는 독일의 정치에 대해 더 잘 알았을 것이고, 실제로 더 잘 알았든 몰랐든 간에 독일 문제에 집중했다. 하인리히는 재위 기간 대부분을 볼레스와프와 싸우는 데 보냈다. 볼레스와프는 기습당한 뒤 배신감을 느끼고 노골적으로 하인리히를 적대하기 시작했다. 하인리히는 볼레스와프와 폴란드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네 차례 원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폴란드는 북동쪽에서 동프랑크 왕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맞수로 성장했다.

 그에 비하면 하인리히의 남방 원정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그는 1004년 이탈리아에서 참칭자를 격파하여 이탈리아 왕위(Rex Italiae)를 지켜냈으며, 랑고바르드 왕위(Rex Langobardorum)를 추가했다. 하인리히가 볼레스와프와 싸우는 동안 로마에서 교황과 귀족들은 끊임없이 권력 다툼을 벌였고, 1013년에는 하인리히가 직접 로마로 가서 질서를 세워야 했다. 물론 하인리히는 로마에 간 김에 대관식을 치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1014년 대관식을 치른 황제는 곧바로 북쪽의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로마를 떠났다.

 하인리히가 이탈리아 문제를 등한시하면서 덩달아 콘스탄티노폴리스와의 관계도 약화되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우호 관계를 지속시킬 마음이 없었고,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며 하인리히의 영향권을 점점 축소시켰다. 이는 교황의 영향력도 약화시키는 일이었으므로, 교황은 하인리히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교황은 별 장식 망토 등 귀한 선물들을 가지고 몸소 독일의 밤베르크까지 하인리히를 만나러 갔고, 하인리히는 썩 내켜하지 않았지만 교황을 버려둘 수도 없는 데다 적대적이고 강성한 동방 제국은 그의 제위에도 위협이 되었으므로 결국 나서기로 했다. 1021년 하인리히는 바실리오스에게 맞서기 위해 남이탈리아로 군대를 몰고 갔지만, 둘 다 전면전은 피하고 싶어했으므로 하인리히의 남이탈리아 원정은 동로마 및 동로마와 동맹한 롬바르드 도시들에 대한 포위전 위주로 진행되었다. 하인리히의 군대는 전투에서 이겼지만 전염병과 보급 부족으로 고생했고, 하인리히 2세마저 1024년에 죽고 말았다. 동로마의 바실리오스 2세 역시 하인리히의 죽음을 이용할 틈도 없이 얼마 안 가 죽었다.

 하인리히 2세는 가톨릭 교회에서 성인으로 인정받은 유일한 독일 황제이다.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이 때문에 오토 왕조는 그를 마지막으로 단절되었다.



콘라트 2세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제관

 하인리히 2세 사후 왕으로 선출된 콘라트 2세는 아마 하인리히 2세 생전에 후계자로 낙점돼 있었던 것 같다. 콘라트가 즉위하면서 잘리에르 왕조가 시작되지만, 콘라트는 이전 왕조의 정책을 거의 바꾸지 않았다. 왕위에 오른 콘라트는 우선 이탈리아 문제를 처리해야 했는데, 파비아가 반란을 일으키고 롬바르드 귀족들이 자기들의 왕위를 외국 귀족들에게 넘기려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제의를 받은 프랑스 왕자 위그와 아키텐의 기욤은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콘라트 2세에 대한 선전포고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제의를 거부했다. 파비아는 하인리히 2세의 사후 반란을 일으켰고, 파비아 시민들은 왕궁을 파괴해 버렸다. 콘라트가 그들을 처벌하려 하자 파비아 시민들은 하인리히가 죽고 다음 왕위가 정해지지 않은 시점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콘라트는 선장이 없다고 배가 없는 게 아니듯이 왕위가 비어 있다고 해서 왕국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며 시민들은 왕국에 죄를 저지른 죄인이라고 반박했다. 파비아는 계속 콘라트를 적대했고, 결국 그는 1026년 파비아를 공격했다. 그는 동시에 롬바르드 귀족들도 공격했는데, 전쟁의 승패는 확실히 가려지지 않았지만 콘라트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1027년 대관식을 치른 콘라트는 이탈리아를 떠났다.

 독일에서 콘라트는 약간의 저항에 직면했지만 곧 지배권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뒤이어 황제를 공개적으로 무시하고 왕을 칭한 볼레스와프와 싸우기 위해 동진했다. 볼레스와프의 아들 미에슈코 역시 왕을 칭하며 작센을 침략했다. 그러나 이후 전쟁에서 미에슈코는 아버지 볼레스와프가 차지했던 영토들을 빼앗기고, 1034년 콘라트에게 항복한다. 콘라트는 영토 분쟁 때문에 헝가리에도 침공했는데, 원정 자체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지만 다행히 내준 영토는 적었다.

 콘라트는 서방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고, 부르군트(부르고뉴) 왕위를 상속받아 지켜냈다. 또한 그는 중장기병들이 자기 소유의 장원을 세습 가능하도록 허용하여 기사 계급이 형성되게 만들었다.

 한편 이탈리아에서 황제를 지지하는 주교들이 지역 귀족들과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위험에 빠졌고, 콘라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1038년 야전에서 밀라노 군을 몰아낸 제국군은 밀라노를 포위했지만, 결국 밀라노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콘라트는 대신 남쪽으로 가서 카푸아 공작 판둘프 4세를 쫓아냈다. 판둘프 4세는 다른 공작령들을 공격해 자신의 영지를 확대했는데, 그 과정에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의심되었으며 쫓겨나자 과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다. 콘라트는 카푸아, 베네벤토, 살레르노의 공작령을 재구축하고 그들의 복종을 받아냈다. 그러나 전염병과 더운 날씨로 인해 더 이상의 원정은 불가능해졌고, 콘라트의 아내인 황후 군힐트마저 죽고 말았다.

 1039년 제국군은 독일로 돌아갔고, 콘라트 역시 병에 걸렸다. 콘라트는 자신의 아들을 차기 황제로 지명한 뒤 숨을 거두었다.



하인리히 3세, 에히터나흐의 세밀화에서, 11세기

 '검둥이' 하인리히 3세는 보헤미아의 혼란, 헝가리와의 대립, 로트링겐의 반란 등 여러 난관에 부딪혔다. 결과적으로 헝가리와는 평화 협정을 맺는 데 성공했고, 보헤미아와 로트링겐 역시 진압했다. 하지만 곧이어 이탈리아에서 문제가 터졌는데, 로마의 귀족들이 교황위를 두고 파벌을 갈라 싸웠기 때문이다. 한쪽은 실베스테르, 다른 한쪽은 베네딕토를 지지했는데 이 베네딕토가 다른 사제에게 돈을 받고 자신의 교황권을 팔아 버렸다. 이 사제가 교황 그레고리오 6세로 즉위했고, 결국 1046년 하인리히가 직접 로마로 와서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이 지리한 다툼에 질려 버린 하인리히 3세는 두 차례의 공의회를 열어 교황권 주장자들을 모두 쫓아내 버렸다. 어쨌든 교황 자리를 돈 주고 산 자에게서 대관을 받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는 열성적으로 성직 매매를 금지시켰으며, 자신의 뜻에 따라 새 교황을 즉위시킨 뒤 1046년 12월 대관식을 치렀다.

 뒤이어 남쪽으로 간 하인리히는 판둘프 4세를 카푸아 공작으로 복위시켰다. 이 한 수를 통해 그는 이탈리아 남부를 효과적으로 안정시키는 한편, 보다 중요하게는 교황이 너무 큰 야심을 품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다른 성과로는 노르만 영주 라눌프와 드로고를 황제의 봉신으로 만들고 그들의 정복지를 인정한 것이 있다. 노르만인들이 차지한 지역은 대부분 과거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으므로, 이 조치는 하인리히의 이탈리아 남부에 대한 영향력 확대에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북쪽의 사정이 다시 악화되어 하인리히는 독일로 돌아가야 했다. 제국 내 귀족들 사이의 갈등이 점점 심해졌던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공작들을 제압하려는 하인리히의 의지였다. 몇몇 귀족들은 대놓고 하인리히를 적대했으며, 왕국은 완전히 분열되지는 않았지만 간신히 유지되었다. 1056년 하인리히는 아들에게 불안정한 왕국을 물려주고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하인리히 4세의 인장, 1089 AD

 하인리히 3세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 하인리히 4세는 고작 여섯 살이었다. 처음에는 모후가 섭정을 맡았고, 귀족들 역시 하찮은 갈등보다는 왕국의 안위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황후의 섭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호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일단의 귀족들이 음모를 꾸며 황후와 어린 황자를 납치한 뒤 공모자들 중 하나였던 주교 안노 2세를 정부 수반으로 세웠다. 하지만 어린 하인리히 4세는 굴하지 않고 천천히 자신의 입지를 다졌으며, 미성년의 나이에도 불굴의 태도를 보였다.

 1066년 황위에 오른 하인리히 4세는 곧 슬라브인들을 상대로 수 차례 전쟁을 치렀고, 곧이어 세 공작의 반란에 직면했다. 이에 더해 1073년에서 1075년 사이에는 작센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하인리히 4세는 이 모두를 진압했지만, 왕국이 중대한 위협에 처해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하인리히의 가장 큰 적은 국내가 아닌 국외에 있었다. 바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였다. 교황과 황제는 주교들의 서임 권한을 놓고 갈등을 빚었고, 이는 세속 군주권과 교황권의 관계를 둘러싼 더 심각한 논쟁을 불러오게 된다...



지정학적 배경
 서방에 대한 위험한 집착을 버린 독일 왕들은 다른 전선의 문제에 집중했다. 우선 마자르인들을 몰아냈고, 그 다음에는 북동쪽의 슬라브인 부족들을 제압했다. 물론 이 두 방면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지만, 독일 왕들은 그들의 제위에 대한 의무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사실 몇몇 왕들은 그 문제에 더 집중하기도 했다. 951년에서 1051년 사이 독일 왕들은 이탈리아에 열 차례 이상 원정했고, 그 결과는 대개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남이탈리아는 문제가 아주 복잡했다. 독일 군대는 동로마 제국, 롬바르드 공국들, 이슬람 세력, 그리고 훗날의 노르만인들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구적인 지배 체제를 구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전면전에서 강력한 독일 군대를 상대로 맞설 수 있는 상대는 그리 많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
 동방 황제는 자신들이 세속의 최고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동방 제국과 서방 제국의 관계는 항상 특별한 문제였다. 카롤루스 대제와 그의 계승자들이 내세운 황제위 주장은 자연스럽게 동방 황제의 권위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세기가 되면, 동방 황제들의 의도와는 달리 서방에서 Imperator Augustus라는 칭호를 쓰는 것은 거의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동방 황제들은 '로마인들의 황제'라는 칭호만큼은 끝까지 양보하지 않았다. 물론 서방에서는 자신들이 로마 시와 로마 인민을 지배하고 있으며, 라틴어를 쓰고, 이교도들로부터 서부 기독교 세계를 지켜내고 있다는 명분을 들어 그 칭호를 썼다.

 이는 계속 분쟁의 요인으로 남았지만, 동로마 제국에서 외교는 어디까지나 국정의 도구 중 하나였다. 서방 황제들은 대개 동방 제국의 이해관계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으며, 반대로 우호 관계의 증진이 더 큰 이득을 불러올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포르피로예니토스는 동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동맹을 통한 이득을 강조한 바 있다. 또 오토 대제가 황제로 즉위하기 전, 로마노스 2세는 그를 "매우 소중하며 깊이 사랑받는 영혼의 형제, 가장 고귀하고 저명한 프랑크인의 왕"이라고 부르며 환영하기도 했다. 나아가 아예 서방 제국을 일종의 '주니어 파트너'로 인정하는 시각도 나온다. 숫사자와 새끼 사자가 당나귀를 사냥한다는 전설을 이용해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숫사자, 오토는 새끼 사자, 당나귀는 파티마조의 칼리프를 가리킨다는 해석이 대표적이다. 니키포로스와 오토가 서로 크기만 다를 뿐 같은 속성을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어느 시점부터 프랑크인/독일인은 더 이상 야만인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테오파네스(Continuatus)가 갈리아의 야만인을 언급했을 때, 그가 가리킨 것은 명백히 사라센이었지 프랑크인들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동로마 제국을 위해 이탈리아의 무슬림 세력과 싸우던 오토는 '주니어 파트너'의 입장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로 인정받고, 그의 아들을 동로마의 황녀와 결혼시키기를 원했다. 니키포로스가 이 요구를 거부하자, 오토는 자신의 군대를 남이탈리아의 동로마 영토로 보내 무력 시위를 벌였다. 니키포로스는 결국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세부 계획을 진행하기 전에 암살되고 말았다. 오토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 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새로 즉위한 요안니스 치미스키스는 대립을 감수할 만한 상황이 되지 못했다. 요안니스는 오토를 '로마인들의 황제'라고 부르는 것은 거부했지만, 그가 서방에 한정해서 그 칭호를 쓰는 것까지 막지는 않았으며 친딸 대신 조카를 신부로 보냈다. 어쨌든 동맹은 성사되었다.

 우호 관계는 바실리오스 2세가 동로마의 이탈리아 지배권을 강화하려 시도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비록 바실리오스의 주된 목표가 시칠리아의 이슬람 세력이긴 했지만, 롬바르드인들과 교황의 영역 역시 목표가 되었으며 이는 하인리히 2세의 개입을 초래했다. 하지만 전면전이 벌어지기 전에 하인리히 2세가 병에 걸려 숨졌고, 바실리오스 2세 역시 이탈리아로 직접 건너오기 전에 죽었다. 이 충돌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노르만인들이 두 세력 모두를 위협하는 새로운 적으로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에 더해 독일 왕들은 독일과 이탈리아 북부의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서방 제국과 동방 제국의 관계는 거의 단절된다. 11세기 중반 이후 노르만인들의 압박은 동로마 제국에 심각한 위협으로 대두되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정치인들과 학자들 사이에서 단호한 반서방 정서가 나타났다. "프랑크인" 혹은 "켈트인"은 다시금 무시무시한 야만인들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노르만인, 독일인, 프랑스인은 더 이상 구분되지 않고 한 덩어리로 여겨졌다. 동방과 서방의 이질감은 점점 심화되었고, 종교적 분열은 양자의 간극을 더욱 더 벌려 놓았다.

 물론,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양자 간에 정치적 이득이 있다면 어떤 간극이든 가교가 세워질 수 있다.



사회
 사회의 하위 계층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왕국의 인구 대다수는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농노들이었다. 귀족 영주들의 지배 하에 놓인 농노들은 간신히 목숨만 연명하며 살았다. 사실 이들의 삶이 엄청나게 끔찍하고 고통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소아기에 살아남기만 한다면 기대여명은 비교적 긴 편이었고, 영양 공급은 간단하고 편중되어 있긴 했지만 생존에 무리가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농노들의 삶은 전적으로 그들의 수확물에 달려 있었고, 돈이나 재화 같은 것은 거의 가지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독일의 국력이 신장되면서 적의 약탈이 과거에 비해 줄어들었기 때문에 이들은 조상들보다 조금은 나은 삶을 살 수 있었다. 또한 영토 확장은 용감한 모험가들을 자극하는 새로운 땅에서의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거의 바뀐 것이 없는 농노들의 삶에 비하면 귀족들의 삶은 비교적 크게 바뀐 편이다. 종교 귀족들은 향촌, 나아가 지역 단위의 행정에 깊이 개입했고, 그들이 동원하는 병력은 왕의 군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가장 신뢰할 만한 전력이기도 했다. 물론 이 같은 봉사에는 대가가 따랐고, 교회의 권력과 독립성은 점점 강화되었다.

 세속 귀족들은 대부분 왕국, 제국의 문제보다는 자신들의 지역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가졌다. 왕과 세속 귀족들의 관계는 대부분 긴장 상태였지만, 전면적인 반란은 대안이 없을 때의 최후 수단으로 남았다.

 대체적으로 귀족들의 행동은 순화되었다. 귀족들끼리 벌이는 사전(私戰)의 숫자도 과거에 비해 줄었고, 자기 영민들을 약탈하는 행위도 삼가게 되었다. 영성 운동, 특히 클뤼니 수도회의 개혁 운동이 효과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귀족들은 선량한 기독교인으로써 그에 맞게 행동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지게 되었다. 즉 약자와 죄 없는 자를 보호하는 정의로운 전사라는 기독교 기사의 이상형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행정 체제가 발전하면서 Ministeriales라는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하인으로써 법적으로 완전한 자유인은 아니지만, 그들이 담당하는 업무 덕택에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게 된 자들이다. 군사력의 상당 부분이 이 Ministeriales로 채워졌다.

 여러 지역들 사이의 교역이 활성화되면서 도시들 역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도시화율은 여전히 낮은 상태에 머물렀다.



군사

중장기병
Apocalypsin Beati의 해설서 중, 1050년 경

 갑옷 입은(Loricati), 혹은 무장한(Armati) 기마병들은 가히 황제의 철권이라 할 만하다. 이들이야말로 기독교 세계의 고결한 수호자로, 번쩍이는 강철 갑옷을 입은 기사들의 선구자들이다. 이들은 조상들과 달리 더 이상 노략질로 여생을 보내지 않고 더 종교적인 삶을 살지만, 물론 이들 역시 성자는 아니다.

 널리 퍼진 편견과 달리, 당대의 중무장 기사(Loricati)들은 복잡한 전술적 기동을 학습하고 실행할 능력을 갖춘 정예병들이었다. 이와 비슷한 병사들이 유럽, 아프리카, 중동 지역의 전장을 지배하게 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엄정한 규율과 함께, 그들의 장비 역시 최대한 유연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적들보다는 중무장하여 막강한 돌격력으로 많은 적을 무너뜨릴 수 있었지만, 동시에 더 중무장한 적들을 압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기동성을 갖추기도 했다. 그들은 당대에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적들을 맞아 싸워 이겼다. 이슬람 세력, 동로마 제국, 노르만, 바이킹, 헝가리, 폴란드, 기타 등등.

 노르만의 대두 이후 그들의 전투 양식과 장비가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지만, 코 가리개가 없고 머리가 평평한 투구 같은 독일 고유의 양식들도 몇 가지 잔존했다.


징집병
 독일의 전장에서 일반인들의 징집은 흔치 않은 일이 되었다. 도시 거주민(Urbani)들은 유사시 도시를 방어하는 데 동원되었지만, 향촌 주민(Comprovinciales)의 대량 징집과 무장은 꺼려졌다.

 그 대신 공작들은 무장과 훈련 상태가 좋은 소수의 징집병들을 원정에 동원했다. (게임플레이의 편의를 위해 우리는 각각의 공작령마다 한 가지 병종을 배정했다. 예컨대 작센에는 석궁병을 주는 식이다. 물론 작센 공작이 휘하에 석궁병만 데리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정예 징집병들은 많은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믿을 만한 보병 전력으로 활약했다.


전략과 전술
 오토 왕조와 잘리에르 왕조 군대의 지휘와 통제 양식은 잘 돌아가던 이전 시대의 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동로마 제국의 그것처럼 복잡하고 고도화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쉽게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왕의 참모단(Consilium Regis)은 주어진 지형과 사회문화적 정보를 토대로 신중하게 원정을 계획했다. 정보 수집과 정찰의 경우 카롤링거 왕조는 대개 여름에 진행했지만, 독일에서는 주로 겨울에 시작됐다. 전략 수립은 언제나 비밀리에 이루어졌으며, 하위 지휘관들은 오직 주어진 명령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정보만 하달받았다.

 프랑크인들은 전장에서 복잡한 전술적 기동을 해낼 수 있었지만, 가능하다면 단순한 전략을 더 선호했다. 중장기병은 여러 차례 돌격을 반복했고, 몇몇은 우회 기동하여 돌격하기도 했다. 이런 기동에는 타이밍이 아주 중요했다. 징집 보병은 후퇴나 퇴각을 엄호했는데, 때로는 아군의 퇴각을 엄호하는 것이 아니라 적의 퇴각을 차단하는 역할까지 했다. 정예 징집병들은 취약 지점을 맡는 데 동원되기도 했다. 정예 징집병들은 공성전에서도 공격, 수비에 자주 동원되었다.

 전장에서 별개의 부대들은 서로 기신호나 트럼펫 소리 따위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오토 왕조와 잘리에르 왕조 시대의 군사적 성과는 퍽 뛰어난 편으로, 대부분의 원정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장군들의 뛰어난 리더십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지만, 징집병의 정예화나 노르만 식 기병 돌격의 도입 등 군대 자체의 역량 강화 역시 중요한 요인이다.


10세기의 유명한 전투들 
승리 : 레히펠트 전투

 아우크스부르크 근방에서 거둔 승리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기적적인 승리였다. 마자르인들은 프랑크 왕국과 이탈리아의 영토를 마음대로 약탈했고, 감히 그들에게 맞서 싸웠던 군대는 모조리 궤멸되어 프랑크 왕권의 허약함만 증명해 주고 있었다. 955년 오토 1세는 각각 1천 명의 기사(Loricati)로 이루어진 8개 군단을 이끌고, 레히 강 근처의 평원에서 더 많은 수의 마자르 병력(사료에 따라 1만 명에서 10만 명까지 다양함)과 대치했다.

 마자르인들은 정면 공격을 시도하는 척 하면서 주력을 돌려 오토의 군대를 포위 공격하려 했다. 맹공을 받은 일부 보헤미아 부대는 패주했고, 보헤미아 부대 옆에 있던 슈바벤 부대는 정면과 측면 양쪽에서 공격을 받아 혼란에 빠졌다. 좌익이 거의 붕괴되고 정면의 위협 역시 전혀 수그러들지 않으면서 오토는 패배하기 직전의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오토는 우익을 지휘하는 '붉은 콘라트'와 프랑켄 부대에게 서둘러 마자르인들의 측면 부대를 역포위하라고 지시했다. 타이밍이 아주 중요했다. 프랑크 우익이 빠져나가면서 전열에 구멍이 생겼고, 이 구멍은 아주 쉽게 돌파당할 위험이 있었다. 반면 콘라트가 너무 미적거렸다가는 프랑크 좌익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만다. 하지만 작전은 적중했고, 서로 싸우던 슈바벤 부대와 마자르인들 모두 엄청나게 놀랐다. 콘라트의 중장기병들은 측면에서 불의의 역습을 당한 마자르인 전열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그 다음에는 그저 추격과 살육이 있을 뿐이었다. 마자르인들은 프랑크 기사들의 추격을 간신히 따돌렸지만, 바이에른 징집병들이 길목에 매복한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다시 살육이 벌어졌고, 귀족들만이 산 채로 사로잡혔다. 그들 역시 이후 레겐스부르크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이 주도면밀한 살육을 통해 독일 영토는 마침내 바이킹, 슬라브, 마자르인들의 끊임없는 약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더 중요하게는 왕권의 강화로도 이어졌다. 오토는 전장에서 '임페라토르'로 환호를 받았고, 나중에 정식으로 황제의 지위를 차지한다.

 또 이 전투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는 신호이기도 했는데, 마자르인 지도자들은 로마 제국의 동맹이자 Patricii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패배 : 크로토네 전투
 콜로나 곶 근교에서 당한 패배는 '독일의 칸나이'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981년 '무쇠 머리'판둘프가 사망한 이후 롬바르드 공국들은 완전히 분열되었고, 판둘프의 후임자들은 서로 싸우기 바빴다. 바실리우스 2세가 막 즉위한 동로마 제국은 내전과 불가르인들 때문에 이탈리아에 아무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다. 이 틈을 노려 알 카심 휘하의 이슬람 세력이 이탈리아에 침입해 왔고, 교황은 오토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오토는 롬바르드인, 동로마 제국, 이슬람 세력들을 모두 상대하며 천천히 전진했다. 롬바르드인들과는 직접 협정을 맺었고, 동로마 제국은 약간의 영토 상실을 감내하면서 전쟁을 회피했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은 오토에게 굴복하지 않았고, 양측의 군대는 콜로나 곶 근처에서 맞붙었다. 독일 기사들의 돌격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심지어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알 카심을 난전 중에 죽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오토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무슬림 예비대가 나타났고, 독일군은 붕괴되었다. 무슬림 측은 4천 명을 죽였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정확한 기록인 것 같다. 저명인사들만 꼽아 봐도 카푸아 대공, 아우크스부르크 주교, 메르제부르크 변경백, 풀다 수도원장 등이 목숨을 잃었다.

 오토 자신은 자신의 말을 넘겨준 유대인과 슬라브 병사 덕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 오토는 바다에 뛰어들었고, 지나가던 동로마 측 배에 의해 구조되었다(그들은 아직 전쟁 중이었다!). 연대기들은 오토가 무사히 귀환하기까지 겪은 여러 모험 같은 이야기들을 전한다. 실제로 오토를 구조한 배의 선원들은 그 '승객'이 얼마나 높은 사람이었는지 몰랐던 것 같지만, 어쨌든 다른 이야기들에 비하면 오토가 그들을 매수했다는 이야기가 더 그럴듯해 보인다.

 이 패배로 독일 왕의 위신은 크게 깎였고, 새로 정복된 동부 지역의 슬라브인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이탈리아 남부 역시 롬바르드인, 이슬람 세력, 동로마 제국에 의해 분할되었다.


병력 규모와 전술
 징집병의 규모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방법은 전혀 없지만, 다행히 indiculus Loricatorum과 다른 자료들을 통해 독일 전체의 전문 직업군인 숫자가 16,000명이었다는 점은 알 수 있다. 물론 그들 모두가 중무장한 기사(Loricati)였다는 점 역시 강조할 만하다. 참고로, 959년 당시 동로마 제국은 29,200명의 전문 직업군인(타그마타)과 150,200명의 테마 주둔군을 보유하고 있다.

 군대는 단순히 중장기병과 반-직업군인 보조병으로 구성된 일차원적 구조를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 전투를 주도하는 것은 거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의 돌격은 아주 막강해서 동로마의 군사 서적들은 한결같이 '프랑크인'들과 정면으로 맞서지 말라고 조언할 정도였지만, 반대로 돌격에 성공하면 이기고 실패하면 지는 제한적인 전술이기도 했다. 단 이는 단순히 다수의 기마병이 한 덩어리로 무식하게 돌격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여러 별개의 부대들이 완벽한 타이밍으로 기동하는 장면이 기록되기도 했다. 또 한가지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전략 예비대로서 정예 징집병들의 활약이다. 예를 들어 그들은 바이에른에서 마자르인들의 퇴각을 차단했으며, 파비아에서는 왕이 고립된 성벽을 돌파해 내기도 했다. 이 두 경우에서 그들은 독립적으로 활동했으며 매우 신중했지만, 반대로 무모하고 야만적인 행태를 보였다는 기록도 있다.

 Indiculus Loricatum 원문 - 생략


오토 왕조 시대 군대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평가
 동로마 군인들은 기사들의 돌격과 그들의 파괴력에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 야만성과 무모함 역시 지적했다. 물론 그들의 군사 '매뉴얼'의 신뢰성이 얼마나 되는지는 의심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레온 6세의 탁티카에 따르면 독일 기사들은 정찰 따위는 하지 않으며 거짓 퇴각에 항상 걸려든다고 쓰여 있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독일인들이 전략적 국면에서 제대로 된 정찰을 통해 적의 침입과 후퇴 경로를 정확히 예측한 사례(레히펠트)나, 전술적 국면에서 탐색전을 벌인 사례(렌젠, 리아데)를 알고 있다. 거짓 퇴각 문제는... 마자르인들과 슬라브인들을 상대로 수많은 전투를 벌인 군대가 그 정도 전술에 쉽게 당하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오토 1세의 사절이자 주교인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를 도발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당신 주군의 병사들은 제대로 말을 탈 줄도 모르고, 말에서 내려서 싸우는 법도 모른다. 그 거대한 방패, 무거운 갑옷, 기다란 칼, 묵직한 투구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도 싸우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과장이 잔뜩 들어갔겠지만, 상대방을 제대로 도발하기 위해서는 그 도발에 진실이 포함되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기사들의 무거운 장비들은 효과적이었으며, 우습게도 니키포로스 역시 자신의 군대에서 중장기병을 타격 부대로 적극 이용했다. 다만 어쨌든 오토 시대의 군대는 동로마의 군대에 비해 훨씬 덜 정교했으며, 취할 수 있는 전술적 선택 역시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군대
1. 일반 징집병
Comprovinciales

 농노들 중에서 징집된 이 병사들은 가장 기본적인 장비만 갖추고 있다. 어차피 제대로 훈련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더 좋은 장비가 있어도 다루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절박한 상황에서 군대의 머릿수를 늘리기 위해 동원된 이들로, 이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다만 농노로서의 고된 삶에 익숙해진 이들은 전장의 고통에도 금방 익숙해질 것이며, 약탈을 통해 한몫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은 충분한 인센티브가 될 것이다.



Urbani

 도시 주민들은 뼈저린 경험을 통해 모아놓은 재산은 적을 불러온다는 교훈을 얻었다. 살면서 최소 한 차례 이상 시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적을 격퇴해야 했다. 비록 장비는 빈약하지만 민병대의 사기는 아주 높은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만약 졌다가는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잃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도시의 성벽을 지키는 이 시민들은 나쁜 놈들을 향해 그 무엇이든 집어던질 준비가 되어 있다. 바이킹, 마자르, 슬라브 약탈자들을 모두 이겨낸 이들을 얕봐서는 안 된다.



Milites Agrarii
 
 이름 자체는 기병을 연상시키지만, 이 병사들은 주로 방어 시설의 관리를 맡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을 보병으로 만들었다. Miles Agrarius라는 용어가 단어 그 자체로 모순되기 때문에, 이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긴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이들에는 공격 작전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이들은 오토 왕조 시대 독일이 바이킹, 슬라브, 마자르 약탈자들의 지속적인 위협에 노출되자 변경 지역에 반 전문적인 방위 병력을 상주시키기 위해 도입되었다. 오토 왕조와 이후 잘리에르 왕조의 군사적 성공, 그리고 영토 확장으로 인해 Milites Agrarii의 필요성은 점차 줄어들었을 것이다.



2. 정예 징집병

Speculatores

 정찰은 독일 군대의 전략, 전술 모든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비록 전투보다는 정찰에 주 목적이 있었지만, 탐색병(Exploratores)들은 스스로를 지키고 적을 쫓아낼 만한 전투력도 갖추었다. 물론 투창의 사거리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대규모 화살 공격을 상대할 수는 없었고, 경기병의 공격에도 쉽게 패주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찰병들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Alamanni

 고전 라틴어식 표현으로는 '알레만니'라고 쓰이는 슈바벤(스와비아) 사람들은 예로부터 뛰어난 검사들로 유명했다. 비록 양손검을 쓰는 후손들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슈바벤의 검과 검사들은 11세기에도 이미 충분히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들의 검은 매우 잘 만들어졌으며, 병사들은 모두 용맹하고 잘 훈련되어 있었다. 원형 방패는 구시대적으로 보이지만, 그들의 검술에는 연 모양 방패(kite shield)보다 원형 방패가 더 나았다. 하지만 그들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는 때로 정도가 지나쳐 오만한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특별히 중무장하지는 않았지만, 적당히 균형잡힌 장비를 갖추고 있어 장기전에도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슈바벤 병사들의 영광의 순간은 키비타테 전투 최후의 저항이다. 700명의 슈바벤 검병을 지원받은 교황의 군대는 노르만인들과 싸웠다. 이탈리아 출신 병사들은 노르만 병사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도주했지만, 홀로 남겨진 슈바벤 병사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돌격하여 전멸했다. 슈바벤 병사들은 그 전에 노르만인들을 도발한 적이 있어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던 것이다.



Bawarii

 바이에른 징집병들의 장비는 비교적 빈약한 편이다. 게다가 그들은 특별히 잘 훈련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어떤 적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나운 전사들로써 어느 군대에서든 환영받는 전력이었다. 접경 지역인 바이에른 지역에 살다 보니 본토 방위에 자주 동원되었고, 그 결과 많은 실전 경험을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동부 공작들의 반란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바이에른 징집병들이 군사사에 남긴 가장 큰 기여는 바로 레히펠트 전투에서 패배한 마자르 군대의 퇴각를 차단한 것이다. 그들은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도로 및 요새를 봉쇄한 채 적을 기다려 기습했고, 침략자들은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



Boemi

 보헤미아는 제국의 변경이지만,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고로 보헤미아의 방위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으며, 지역 귀족들은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보헤미아에서 파견된 보병들은 전문적이고 훈련과 무장 상태가 높은 병력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노르만 식 최신 장비도 빠르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 병사들은 대부분 노르만식 연 모양 방패를 들었지만, 동부의 영향을 받은 투구와 미늘 갑옷 역시 애용했다. 적 기병대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이 중무장 창병들은 배의 닻처럼 군대에서 중요한 전력이었다. 이들의 전력은 보헤미아의 방위에 아주 중요했으며, 그 때문에 보헤미아 밖의 지역에서 황제의 원정에 동원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Saxones

 11세기 들어 과거의 무기, 석궁이 새로운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석궁은 먼 옛날부터 쓰였으며, 활에 비해 확실한 몇 가지 장점이 있었다. 우선 숙련되기가 매우 쉽고, 갑옷을 뚫어 버릴 수 있었으며, 매우 값싼 무기이기도 했다. 비교적 적은 노력으로 무지렁이 농노들을 강력한 전력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귀족들은 이런 무기의 확산을 금지하고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독일 역시 석궁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그 확산이 더디게 진행되었다. 석궁병이 가장 먼저 출현한 것은 왕의 직속 영지인 작센 지역이었고, 작센은 석궁 외에도 여러 군사적 혁신의 기원이 된 곳이었다.



Franci

 '프랑크인'이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을 간직한 프랑켄 병사들은 뛰어난 창병인 동시에 도끼의 명수이기도 했다. 도끼는 단순하고 값싼 무기였지만, 프랑켄 병사들은 창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나 적을 당황시키고 싶을 때 도끼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프랑켄 지역은 서프랑크 세력의 위협에 자주 노출되었고, 프랑켄 병사들 역시 대외 원정보다는 본토 방위에 주로 동원되었다. 프랑스 지방에 가깝다 보니 이들의 장비는 서유럽 양식에 더 가까운데, 바이외 태피스트리에 나오듯 서유럽에서는 타원형 방패가 인기있었다. 나중에 대 프랑스 변경이 안정되고 프랑켄 지역이 번영하게 된 이후에는 사슬 갑옷 셔츠의 사용이 확산되었다.



Frisii Liberii

 전설에 따르면 카롤루스 대제는 프리지아 전사들의 무용에 엄청난 감명을 받아 프리지아인들에게 자유를 선사했다고 한다. 자유란 곧 프리지아인들은 로마 황제를 제외한 어떤 영주의 지배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 역사가들의 좀더 그럴듯한 설명에 따르면, 프리지아인들은 북방에서 침입해 오는 약탈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군역에서 면제된 것이라 한다. 동시에 프리지아에는 봉건 체제가 성립되지 않았고, 독립적인 농민과 상인 계급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결과 프리지아 사람들은 자기 재산을 보유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자유민 병사들이 되었는데, 중세 유럽에서 그리 흔한 풍경은 아니었다.

 지방 귀족들은 여러 차례 그들을 통제하려 했지만, 프리지아인들은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프리지아인들은 최소 두 명 이상의 백작을 죽였지만, 왕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북쪽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프리지아인들은 여러 차례 황제의 편에 써서 싸웠지만, 동시에 용병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프리지아 용병들은 영국의 알프레드 대왕의 군대는 물론 854년 이슬람 세력의 공격을 받은 로마의 성벽에서도 싸웠으며, 11세기 이후에는 이베리아에서 팔레스타인에 이르는 각지로 퍼져나갔다.

 프리지아의 자유민 전사들은 방어전에 능하다. 그들의 화살은 멀리 떨어진 어떤 적도 쏘아 맞힐 수 있고, 근접전에서는 다른 궁수들과 달리 전혀 물러서지 않고 굳건하게 검을 휘둘러 위치를 사수할 것이다.



3. 직업군인과 귀족들

Clypeati

 오토 왕조 시대의 군사적 시각에서 볼 때 경무장한 기병은 별로 쓸모가 없었지만, 어쨌든 적은 숫자나마 존재하기는 했다. 큰 방패가 특징인 이 기병들은 지형을 정찰하고 적을 교란하며 중장기병을 보조했다. 물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는 데도 유용했다. 하지만 적진을 상대로 정면 공격을 시도하거나, 반격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전투를 시도하는 것은 최대한 삼가야 한다.



Loricati

 독일 군대의 주력 부대는 로리카투스(Loricatus), 즉 중무장한 기사였다. 대귀족의 봉신 혹은 Ministeriales(왕의 신하)로서 그들의 삶의 거의 대부분을 전쟁이 차지했고, 따라서 이들의 훈련도는 매우 높았다. 이들의 예술적인 장비들은 최신 노르만 스타일 기병 양식을 따른 것이다. 사슬 갑옷, 철 투구, 연 모양 방패로 단단히 무장했지만, 동시에 공격과 이탈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유연성도 갖추었다. 이에 더해 겨드랑이에 창을 끼우는 돌격 방식(couched lance)도 도입한 이들은 저 유명한 유럽 기사들의 제 1세대라 할 수 있다.



Domini ac Defensores

 하급 귀족들은 중무장한 기사, 로리카티로써 전투에 나선다. 그들은 신민들의 영주(Domini)인 동시에 새로운 기독교 윤리에 따른 수호자(Defensores)이기도 했다. 물론 그들은 열성적으로 자신의 영지와 영민들을 방어했지만, 그들의 이해관계는 주로 자신의 영지에 있었으므로 다른 기사들과 달리 멀리 떨어진 지방에 대한 원정은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충분한 방호력과 뛰어난 기동력을 갖춘 이들은 다재다능한 충격기병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장비 중 일부, 즉 원형 방패 같은 것들은 구식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Domestici

 이 기사들은 오직 황제에게만 충성하는 황제의 직속 부대이자 최정예 병력이다. 높은 충성심과 전투 기술로 선별된 이들은 왕의 명령을 철저하게 따르는 고귀하고 용맹하며 맹세에 충실한 전사들이다. 기창 돌격에서 그들을 능가할 만한 자는 거의 없으며, 그들은 동시에 뛰어난 검사이기도 하다. 얼음장 같은 북해의 해안에서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남이탈리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지방의 적들이 이들 앞에 무너졌으며, 이들은 실로 다양한 적들을 상대로 경험을 쌓아 왔다.

 황제 직속 병사들은 다른 독일 병사들에 비해 이탈리아 지역에 더 자주 머물렀고, 다른 지역의 군사 문화를 접할 기회도 더 많았다. 이들은 사슬 갑옷 위에 미늘로 된 흉갑을 덧입었는데, 이는 동로마 제국의 영향을 받은 것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독일 황제들이 로마 제국의 부활(Renovatio Imperii)을 선언하면서 더 고풍스러워 보이는 갑옷을 찾다 보니 생긴 결과였을 것이다.



Legio Slavica

 외국인으로 구성된 근위대를 창설하는 것은 로마 제국의 전통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유용한 방법이기도 했다. 외국인 병사들은 국내 정치 싸움에 별 관련이 없으며 국내에 특별한 이해관계도 없었으므로, 다른 귀족들에 비해 왕에 대한 음모를 꾸밀 필요가 별로 없는 것이다.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전적으로 왕에게 달려 있었으므로, 그들 입장에서는 왕을 보호하고 그의 명령을 완수하는 쪽이 더 이득이었다. 게다가 이 '야만적인' 외국인들은 이교도이기까지 했으므로 국내의 적들을 충분히 공포에 떨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 이유와 별개로 그들의 뛰어난 전투력 역시 충분한 고려 대상이었다. 도끼와 칼을 다루는 데 특화된 중장보병 부대는 독일 자체적으로 조달하기 어려운 병력 유형이었고, 이 '슬라브인 군단'은 군사적으로도 아주 유용한 자산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일에서 이 슬라브 병사들이 출현한 것은 982년으로, 동로마 제국의 바실리오스 2세가 그와 비슷한 '바랑기 근위대'를 창설하기 불과 6년 전의 일이었다.



Consilium Regis

 왕의 참모단은 가장 신뢰받는 장교들, 대귀족들, 왕과 함께 자란 봉신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단순한 호위병들이 아니라 왕의 동료이자 친구요, 왕의 그림자이자 왕의 가장 뛰어난 대전사(Champion)였다. 그들의 삶과 죽음은 모두 왕에게 달려 있었고, 이 '왕의 형제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왕을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싸움 실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위험한 전투, 원정 중의 고된 환경,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암살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삶은 항상 위험으로 가득했고, 살기 위해서는 항상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다. 왕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나은 호위병들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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