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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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 Conflicts - 로마 제국 타그마타 프리뷰 게임

프리뷰 원본 주소

물론 테마 유닛 프리뷰도 있습니다. TGC 모드의 비잔틴 역사 배경 설명도 그쪽에 있죠.

그런데 테마 유닛 프리뷰는 유닛 설명까지 전부 이미지 파일로 되어 있는 물건인데, 유닛 스크린샷을 포함한 그 이미지 파일들이 전부 호스팅 만료돼서 이제 못 구합니다. 고로 패스 ㅋㅋㅋ

Rhomaion Politeia - 로마인들의 국가



프롤로그

 만약 우리가 아래에서 다룰 중세 로마 제국의 중앙군 부대(타그마타)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에 제목을 붙여야 한다면, 그 제목은 q분명 다음과 같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없다." 과거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스스로의 승리와 업적을 호메로스의 서사시처럼 상세하게 후세에 전해 줄 역사가가 없음을 한탄했다고 한다. 중세의 로마 황제들도 그와 똑같은 문제에 처해 있었다. 당대의 사건들을 서술한 기록자들은 그 세부 사항에 대한 설명은 거의 하지 않는다. 첫째로 그들은 동시대 사람들을 독자로 상정하고 글을 썼기 때문에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굳이 장황하게 늘어놓을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고, 둘째로 그들은 단순히 '이야기꾼'에 불과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당시의 병사들이 정확히 어떻게 무장했는가'와 같은 세부 사항들까지 설명할 수 있을 만큼의 전문성을 갖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 결과 우리는 당대의 사료는 그럭저럭 많이 접할 수 있지만 그 사료들에서 세부 사항까지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행히 당대의 병사들을 "복원"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료가 없지는 않다. 그것들은 대개 군대와 관련된 이들이 남긴 기록이며, 이번 모드의 프리뷰에서 다룰 것이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레온 6세의 '탁티카' (Leonis Imperatoris Tactica)
 2. 저자 불명의 '스트라테기콘' (Sylloge Tacticorum)
 3. 니키포로스 포카스의 '프라이셉타 밀리타리아' (Praecepta Militaria)
 4. 니키포로스 우라노스의 '탁티카' (Taktika)

 이 군사 매뉴얼들은 바로 야전 장교들을 대상으로 병력의 배치, 훈련, 심판, 무장, 그리고 군대의 지휘 방법에 대해 조언하기 위해 쓰여진 것들이다! 이 문헌들을 통해 우리는 군대가 다양한 유형의 적들을 상대한 방법, 병사 및 군마들의 훈련 방식, 명령 체계, 그리고 무엇보다 장비들에 대해 알 수 있다. 하지만(이 분야를 다루다 보면 '하지만'이 참 많이 나오게 된다) 각 부대가 식별을 위해 정확히 어떤 색상이나 표식을 썼는지 알려주는 문헌은 없다. 대략 수백 년 정도 차이나는 문헌들을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당신은 우리가 만든 아래의 '엑스쿠비토레스' 유닛을 보고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그들의 부대를 나타내는 색상이 짙은 녹색인데, 이는 이전 시대의 기록들을 참고해 결정한 것이다. 5세기~8세기 경 그려진 그림들을 보면 황궁 근위병들은 짙은 녹색 튜닉을 입고, 짙은 녹색으로 칠해진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물론 우리는 다른 시대의 엑스쿠비토레스 병사들은 다른 표식이 그려진 방패를 썼으리라는 사실을 잘 안다. 하지만 모든 군사 매뉴얼에서 부대는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지고 식별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고, 우리는 그를 위해 색깔을 정해야만 했다. 따라서 우리가 정확한 사료적 근거 없이 정한 색깔은 실제와 맞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 "정신"을 최대한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다.

 둘째는 엑스쿠비토레스 유닛이 드라코 군기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부대들의 군기에 대해 다룬 스도 코디노스의 De Officiis에서 엑스쿠비토레스 부대의 군기병들은 대개 Dragonarii라고 불렸다. 다른 문헌들에서는 바랑기 근위대 역시 드라코 군기를 썼다고 나오는데, 아마 바랑기 부대도 바실리키(Vasilike), 혹은 메갈레 이테리아(Megale Hetearea)로 분류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게임 시스템상의 이유로 다른 유닛(바실리키 이테리아)의 군기에도 드라코를 선택했다. 이 유닛에 실제로는 특수/비밀 무기 담당 병사였고, 별개 부대로 존재하지 않았던 시포나토레스(Siphonatores)들을 따로 배치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사실들:
 타그마타 유닛들은 원수정 말기의 직업군인 부대와 군단들의 기본적 원칙을 계승했다. 그들은 완전한 직업군인으로써 인생의 대부분을 전쟁 준비로 보내며, 세계 최고 수준의 훈련과 장비를 갖췄다. 고로 중세의 로마 제국은 공화정 시대의 시민군(테마)과 원수정 시대의 상비군(타그마) 체제가 병존하는 군사 체계를 갖추었던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중세의 직업군인 '로마 군단'들은 국경 지대가 아니라 수도나 대도시 근처에 주둔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또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역사상 이 부대들은 그 자체로 -최소한의- 공격(kursores)과 방어(defensores) 편제의 원칙을 갖춘 독립적인 부대들이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말하는 공격 제대(kursores)는 활, 투창 등 원거리 무기로 무장한 병력이고, 방어 제대(defensores)는 창/기창으로 무장한 병력이다. 이를 (게임 엔진의 틀 안에서) 그대로 구현하자면 부대마다 별 의미 없는 클론 유닛들을 잔뜩 만들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엑스쿠비토레스는 황궁 경비병 버전과 캐터프랙트 기병 버전이 따로 있어야 하고, 스콜라리와 이카나티는 창기병/궁기병 버전이 각각 따로 있어야 하고 등등... 우리는 그렇게 만드는 대신, 각 부대를 서로 완전히 다른 병종으로 설정함으로써 게임플레이적 측면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플레이어들에게 다양한 타그마 부대들이 있었다는 점을 알리고자 했다.


타그마 부대

소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제국의 수도이자 전략적 요충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역대 로마 황제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다수의 영구 주둔군을 배치하는 것을 꺼렸다. 주된 이유는 정치, 경제적인 문제였다. 수도에 많은 병력을 배치하면 그만큼 그들을 부양하기 위한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또한 수도 내에 배치된 강력한 군사력은 유사시 황제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 그 결과 콘스탄티노폴리스 내부의 군사력은 소수의 황제 친위대로 한정되었고, 도시의 방어력은 주로 막강한 육상 성곽과 바다를 지키는 함대에 의존하게 되었다. 물론 공성전이 시작되면 수도 주위의 군 병력이 가세하고 시민들도 무장하여 방어에 나설 것이다.


중세 초기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의 군사력

 중세 초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제국 주둔군은 '스콜라이(스콜라이 팔라티나이 Scholae Palatinae)'라고 불렸다. 스콜라이 부대는 312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대립 황제인 막센티우스 편에 가담했던 기존 근위대(프라이토리아니)를 해체한 뒤 그들을 대신하기 위해 창설했다. 스콜라이 부대의 병사들은 원레 게르만 족 출신의 기마병들이었지만, 점차 전투력이 약화되어 6세기 경에는 거의 의전용 부대로 전락했다. 초창기 스콜라이 주둔군의 병력 수가 정확히 얼마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스티니아노스 1세(527-565) 시대에는 각각 500명으로 구성된 7개의 스콜라이 부대가 있었다. 황궁 안에 3,500명이나 되는 병력을 한꺼번에 수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으므로, 아마 한두 개의 부대가 돌아가면서 황궁 경비 임무를 맡고 나머지는 비티니아나 갈라티아 일대에 주둔했던 것 같다.

 황제 레온 1세(457-474)는 스콜라이 근위대의 약체화에 대처하기 위해, 자신의 고향인 이사우리아에서 뽑은 300명의 병력으로 새 근위대 엑스쿠비토레스를 창설했다. 이들의 주 임무는 황제의 개인 경호였지만, 테오도시오스 성벽의 방위에도 자주 동원되었다.

 수도에 대한 공격이 예상될 경우, 황제 친위대 이외에도 트라키아와 비티니아에 주둔한 두 '마기스트리'(magistri militum praesentales) 휘하의 정규군 병력이 성벽 방위를 위해 동원되었다. 그 외에도 무장한 시민들, 길드와 시정 당국의 구성원들도 방어에 참여했다. 이에 더해 일종의 경찰 업무를 담당한 시장(Eparchos) 휘하의 준군사조직인 페다투라, 케르케톤 등도 있었다.


중세 중기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의 군사력

 7세기 초, 두 개의 마기스트리 밀리툼 프라이센탈레스 직이 옵시키온(라틴어로 '경호대'를 뜻하는 obsequium에서 유래)이라느 이름 아래 하나의 조직으로 합쳐졌다. 옵시키온은 한동안 트라키아와 비티니아에 나뉘어 주둔했지만, 그 뒤 완전히 비티니아로 옮겨가 비티니아 테마의 방어를 맡았다. 그 뒤, 7세기 말부터 사료들에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의 부대로 누메리(Noumeroi), 티키오테(Teicheotae) 등이 거론되기 시작한다. 이들은 유스티니아노스 2세(685-695, 705-711) 대에 요새화된 황궁(Ieron Palation)의 성곽과 문을 지키는 데 투입되었다.

 중세 시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둔 군사력의 성격을 규정하게 된 가장 중요한 변화는 8세기 중엽 콘스탄티노스 5세(741-775)의 계획에서 출발한다. 옵시키온의 코메스(지휘관 혹은 백작)인 아르타바스도스의 반란을 진압한 콘스탄티노스 5세는 향후 비슷한 사태가 재발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 결과 옵시키온 부대는 약화되었고, 뒤이어 스콜라리와 엑스쿠비토레스가 재조직되었다.

 콘스탄티노스 5세는 황제 자신에게 충성함은 물론, 그의 성상파괴주의까지 지지하는 병사들을 골라 뽑아 황실 근위대에 배치했다. '타그마(복 타그마타)'라는 이름이 붙은 새로운 근위대는 기존 부대들을 재편성한 부대였으며, 그들의 역할은 더욱 확대되었다: 황궁 경비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비는 물론, 황제의 친정에 참여하는 중앙군의 역할도 부여받은 것이다. 기존의 근위대(스콜라이, 엑스쿠비토레스)는 병력이 증강되었으며, 도메스티코스(Domestikos)를 지휘관으로 삼았다. '스콜라리'는 점차 모든 타그마 부대를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고, 근위대장(Domestikos ton Scholon)은 군 서열에서 아나톨리아 사령관(Strategos tou Anatolikou) 바로 다음 가는 지위가 되었다. 훗날(9~10세기)에는 아예 근위대장이 황제를 대리하여 전역을 총지휘하기도 했다. 엑스쿠비토레스 같은 타그마 부대들은 계속 황제 경호 임무를 담당했지만, 함께 '바실리키 이테리아(Vasilike Hetaeria)'를 이루는 다른 타그마 부대의 부대원들과 함께 복무했다. 이 황실 근위병들은 안트로피 투 바실레오스(Anthropoi tou Vasileos), 바실리키 안트로피(Vasilikoi Anthropoi), 마글라비테스(Maglavites)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스콜라리 부대는 아티네의 이리니(780-802) 가 추진한 성상파괴주의 철회 시도에 반발했다. 황후는 그에 대한 대응으로 근위대의병사들을 강제 퇴역시키고 빈 자리를 신병들로 대체했으며, 자신에게 충성하는 테마 출신 병사들을 모아 제 3의 부대인 타그마 투 아리트무(Tagma tou Arithmou) 혹은 비글라(Vigla)를 창설했다. 나중에 아리트무 타그마는 누메리 타그마(Numeroi Tagma)와 병합되어 하나의 부대가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니키포로스 1세가 이카나티 타그마(Tagma tou Hikanati)를 추가로 창설했고, 이 4개 부대가 향후 11세기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 방위의 핵심이 된다. 비슷한 시기 엑스쿠비토레스 부대의 잔류 인원들이 바실리키 이테리아와 병합되어 그 일부가 되었다. 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969-976)는 여기에 아타나티(Athanatoi, '불사자들')를 추가했으며, 이 타그마 체제는 AD 1204년까지 잔존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황실 근위대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황제다. 그는 바실리키 이테리아에 6천 명의 바랑기 드루지나(Varangian Druzhina)를 추가하고, 자국민 병사 수는 그만큼 줄였다. 바실리오스는 황제로 완전히 즉위할 때까지 여러 차례의 반란을 겪어야 했고, 자신의 '근위병'들을 전혀 믿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더 훗날, 주로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타그마 부대들은 완전히 사라지고 바실리키 이테리아만 남게 된다. 바실리키 이테리아에는 새 용병들이 계속 보충되었지만, 그 대부분은 잉글랜드 출신들이었다.

 제국 말기에도 여러 자국민 출신 상비군 부대들이 나타난다. 예를 들자면 파라모네(Paramonae, 13세기 중반부터 나타나지만 1315년 이후 언급이 없다), 무르타티(Mourtatoi, 로마인과 튀르크인의 혼혈 출생자들로 구성된 보병 궁수 부대), 짜코네스(Tzakones, 펠로폰네소스 지역 출신자들로 황실 근위대는 물론 해병, 경찰 업무까지 맡았다. 동시에 펠로폰네소스 지역의 주력군으로써 기병을 포함한 모든 병종이 포함된다)등이 있었다. 1204년 이후 제국 상비군 부대-주로 기병-들은 타그마 대신 알라기온(Allagion)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황제의 친정에 참여하는 타그마 부대 전체를 가리킬 때는 바실리키 신탁시스(그리스어 Bασιλική σύνταξις)라고 했다.

 타그마 부대의 정원이 정확히 얼마였는가 하는 문제는 오랜 논쟁의 대상이었다. 많은 역사가들이 512명 설을 지지했는데, 그 512명이라는 숫자가 매우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John Haldon은 각 부대별 병력이 1000-1500명 선이라고 추측한 반면, 과거 Treadgold와 다른 학자들은 4000명이라고 보았다. 512명이라는 숫자는 1203년 다시 등장하는데, '로리카티'라고 불린 제국군 부대가 80명의 기사들과 맞붙었을 때의 일이다.

 512명 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타그마'라는 단어 자체에 주목한다. 타그마는 반돈(Vandon)과 대응되는데, 테마 군제에서 반돈은 280-410명 규모의 부대를 가리킨다. 512명이 일반적인 한 부대의 숫자(400명)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또 많은 사람들이 512명이 타그마 기병 부대가 주로 사용했던 쐐기꼴 진형에서 하나의 쐐기꼴을 이룬다고 봤다.

 더 큰 숫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전장에서 타그마 부대들이 다른 부대들 없이 자신들만 가지고 완전한 일군의 대열(중앙과 좌우 양익)을 갖추었다고 쓴 몇몇 희귀한 기록들에 주목한다. 각 타그마는 2명의 군기병(vandophori)을 갖췄다는 스도 코디노스의 기록(14세기 중엽)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군기는 주로 전장에서 지휘관이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표식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두 명의 군기병이란, 어쩌면 황제의 군기(labarum)을 가진 지휘관은 중앙에 위치하고, 양익에 병력을 별도로 배치하여 식별하게 했음을 시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512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이처럼 3개의 독립된 진형을 구축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다. 반돈들은 (테마 병력과 마찬가지로) 공격 담당(kursores)과 수비 담당(defensores) 병력이 나뉘어 있는 이중 전투 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터 큰 숫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특정 시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수비군 숫자가 매우 많은 점 역시 지적한다. 우리는 제위를 둘러싼 내전이 발생했을 경우, 타그마타야말로 황제가 동원할 수 있는 가장 믿을만한 전력(적어도 바실리오스 2세 이전에는)으로써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의 다른 군사력을 제압해야만 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1203년 평시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5만 명에 달하는 수비대가 있었음을 감안하면, 512명으로 구성된 7개 부대, 즉 3854명의 친위대 숫자는 너무 적어 보인다.

 9세기에서 11세기 사이 제국은 수많은 전쟁을 치렀고, 많은 적들이 수도 근처까지 접근하곤 했다. 따라서 테오도시오스 성벽과 해안 성벽에 설치된 수많은 성탑들에 병력을 배치하기 위해서라도 저 정도로 많은 수의 수비대가 있었다고 상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다른 측면에서 봐도, 특정 시기의 기록들을 보면 식량 공급과 세입이 예상보다 적은 바람에, 타그마 부대를 수도 밖의 지역에 주둔시켜 그 지역에서 '강제로' 식량과 봉급을 제공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있다. 타그마 부대의 총원이 3584명에 불과했다면 수도에서 식량과 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나머지 4만 7천 명 규모의 수비대는 남겨 두고, 고작 3천 명에 불과한 친위대만 밖으로 내몰았다는 말이 되는데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1203년쯤 되면 타그마타 부대들은 거의 자취를 감춘 상태였지만, 대규모의 전쟁이 길게 이어지는 시기에 서로 다른 전선에서 싸운 친위대 병력의 총합이 3584명이라면 이는 너무 적은 것이다.

 아마도 친위대의 규모는 각 시대 전쟁의 상황에 따라 달라졌으리라는 것이 더 그럴듯한 가정일 것이다.


부대별 군기와 캐릭터

 14세기 스도 코디노스의 기록(De Officiis)에 몇 가지 군기에 대한 설명이 있지만, 어떤 부대가 그 군기를 사용했는지에 대해 자세한 설명까지는 나와 있지 않다. 따라서 아래 스크린샷 중 몇 가지는 가상의 설정이다.


황제의 군기



스콜라리(Tagma ton Scholarion) 부대기



엑스쿠비토레스(Tagma ton Excubitoron) 부대기



이카나티(Tagma ton Hikkanaton) 부대기



티키오테(Tagma ton Teichon) 부대기



아리트무(Tagma ton Arithmou) 부대기



아타나티(Tagma ton Athanaton) 부대기



바실리키 이테리아의 라바룸(가상)



캐릭터 모델 - General



캐릭터 모델 - Captain



타그마타


스콜라이 팔라티나이 / 스콜라이 / 스콜라리 (Scholae Palatinae / Scholae / Scholarioi)

 스콜라이는 4개의 주요 타그마 기병부대 중 최선임 부대이며, 가장 역사가 오래된 부대이기도 하다. 이들은 정예 친위부대로 조직되었으며, 대개 콘스탄티누스 1세가 프라이토리아니의 기병 부대인 에퀴테스 싱굴라레스 아우구스티(Equites Singulares Augusti)를 대체하기 위해 창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AD 5세기의 노티티아 디그니타툼에는 일곱 개의 스콜라이 부대가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4세기 경부터 쓰이기 시작한 "스콜라"라는 단어는 제국의 민사, 혹은 군사 분야에서 개별 단위로 조직된 부대나 부서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하나의 부서나 부대는 황궁에서 하나의 방을 같이 썼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스콜라이는 나중에 추가된 엑스쿠비토레스와 함께 8세기 초엽까지 잔존했지만, 규모는 점차 축소되어 순전히 의전용 부대로 전락했다. 하지만 743년 경 테마 군대의 대규모 반란을 진압한 황제 콘스탄티노스 5세는 황제 직속의 충성스러운 직업군인 집단을 원했고, 이를 위해 기존의 친위대 조직들을 재편하여 새로운 타그마 부대를 만들었다. 이들은 로마 원수정 후기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야전군 조직이었으며, 동시에 군사령관이나 고위공직자가 되려는 젊은 귀족들이 군 경력을 쌓는 중요한 통로가 되기도 했다. 

 스콜라이 부대의 병사들은 중무장한 충격기병인 동시에 궁기병의 역할도 했다. 그들의 무기와 갑옷은 역할, 지위, 경제 상황에 따라 달랐다. 개중에는 로마 기병 가운데 장비와 전술 부문 양측에서 정점에 이른 클리바나리 부대도 포함된다. 병사와 말 모두 중장갑을 갖추었고, 막대한 유지 비용 때문에 그 숫자는 항상 제한적이었다. 갑옷 위에 부대의 식별 기호, 장식이 들어간 화려한 색상의 누비옷(gambeson)을 덧입기도 했는데, 이를 에플리오리키온이라고 한다.

 스콜라이 부대의 지휘관인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δομέστικος τῶν σχολῶν)에 관한 기록은 767년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스콜라이 부대의 도메스티코스는 제국군 내 최선임 장교 가운데 하나로써, 그보다 지위가 높은 장교는 아나톨리콘 테마의 스트라테고스 뿐이었다. 10세기에 이르면 스콜라이 부대의 도메스티코스는 제국군 전체의 최선임 장교로써, 황제 바로 아래에서 실질적인 제국군의 총사령관 역할을 맡기에 이른다. 이들을 대개 大(메가스) 도메스티코스라고도 부른다. 959년에는 부대 지휘권이 둘로 양분되어 각각 동부 사령관(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 티스] 아나톨리스)과 서부 사령관(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 티스] 디시오스)이 되기도 했다.



이카나티 (Hikanati)

 9세기 초 니키포로스 1세에 의해 창설된 이카나티(Ικανάτοι, '유능한 자들')는 타그마 기병 부대들 가운데 가장 최근에 창설된 부대다. 이들은 아마 간부후보생 부대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니키타스 다비드 파플라곤의 Vita Ignatii에 나오는 구절에서 확인된다. 그에 따르면 부대의 첫 지휘관(domestikos)는 니키포로스 황제의 조카이자 훗날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가 되는 니키타스였다. 더 훗날 11세기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 황제 시대에 아르콘토풀레(Archontopoulai, "귀족 자제들")라는 이름의 비슷한 부대가 창설되기도 한다.

 이카나티는 비글라 타그마 부대를 모델로 창설되었으며, 이카나티 부대의 지휘관(δομέστικος τῶν Ἱκανάτων, 도메스티코스 톤 이카나톤)은 대개 프로토스파타리오스의 지위에 있었다. 이 귀족 자제들로 구성된 중장기병 부대는 오만하고 충동적이었지만 다른 타그마 부대들과 같은 경험을 갖추지는 못했다. 그들의 엘리트적 특성은 장비만 봐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그들은 귀족답게 최고급, 최신식의 장비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타그마 톤 티콘 / 티키오테 (Tagma ton Teichon / Teicheotae)

 타그마 톤 티콘(벽의 타그마)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을 방어하는 두 개의 정예 부대 가운데 하나로써, 유스티니아노스 2세에 의해 창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장비와 역할 측면에서 타그마 톤 아리트무/누메리 부대와 유사했으며, 두 부대를 같은 부대로 취급하는 기록들도 많다. 이들은 정예부대로써 제국에서 조달 가능한 것들 중 가장 좋은 장비로 무장했고, 따라서 중장보병이었다. 원래 그들은 대 황궁(Ieron Palation) 성벽의 경비병으로써 코메스 톤 티콘('벽의 백작')의 지휘를 받았다. 그러나 이후 수도 방위군의 핵심으로 자리잡으면서 그들의 담당 범위는 테오도시오스 성벽까지 확대되었다.

 원래 티콘 타그마 부대에는 근접전 담당과 사격전 담당 병사들이 모두 포함되지만, TGC 모드에서는 그들을 정예 중무장 궁병의역할로 한정했다.



바실리키 안트로피 (Vasilikoi Anthropoi)

 바실리키 안트로피, 혹은 '황제의 사람'이라는 용어는 황제의 친위대와 타그마 부대 중 황제를 근접 경호하는 부대 인원들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이 부대 구성원들은 대개 친위대 장교들로, 전장과 궁정에서 황제의 개인 경호를 맡는다. 이 엘리트 부대에는 로마 귀족 계급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고관대작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스파타리이(Spatharioi, 검을 든 사람)는 스파타로칸디다티, 프로토스파타리이로 나뉘고, 스파타로쿠비쿨라리이는 환관과 수염난 자들(Βαρβάτοι, 바르바티)로 나뉜다. 성스러운 황궁의 엄선된 타그마 병력인 칸디다티이, 황실의 메신저인 만다토르, 마지막으로 황실의 종자인 스트라토르가 있다. 스트라토르들은 '승리의 십자가'로 장식된 황제의 기(Flamoulon)를 가진 프로토스트라토르가 지휘한다.

 바실리키 안트로피의 프로토스파타리오스라는 별도의 직책을 가진 자가 이 엘리트들을 통솔한다. 이들은 황실의 최정예 병력으로써 이들은 높은 훈련도와 사기를 갖추고 있지만, 동시에 휘황찬란한 외양을 자랑하기도 한다. 그들은 모두 호화로운 겉옷과 정교하게 만들어진 갑옷을 입었으며, 황실에서 기른 니사이아 산 군마를 탄다.



아타나티 (Athanatoi)

 '불사자不死者들'(그리스어 Ἀθάνατοι, 아타나티)는 10세기 경에 처음 창설된 타그마 부대이다. 요안니스 치미스키스의 루스 원정에서 처음 등장한 이들은 그 뒤 잠시 사라졌다가, 미하일 7세 시대의 재상 니키포리치스의 군제 개혁 과정에서 재건되었다. 불사 부대라는 이름은 고대 페르시아의 불사 부대에서 차용한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 여러 가지일 것이다. 당시 유행했던 고전 시기로의 회귀주의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고, 병사들이 그 이름대로 영웅적이거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기를 기대한 이름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냥 병력 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겠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매우 정교하고 화려한 갑옷을 갖춘 젊은 귀족들로 구성된 이 부대는 강력한 중장기병의 역할을 했다. 레온 부제(Leo the Deacon)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의 갑옷은 '금과 은'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클리바나리 스콜라리"와 비슷하게 전장의 선봉을 맡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돌격하는 모습은 굉장한 장관이었을 것이다.

 다른 타그마와 마찬가지로 불사 부대의 대장은 도메스티코스 톤 아타나톤(불사 부대의 ~)이었으며, 부대의 규모 역시 다른 타그마들과 비슷했을 것이다.




엑스쿠비토레스 (Excubitores)

 엑스쿠비토레스/엑스쿠비티(라틴어 excubitores/excubiti, 그리스어 ἐξκουβίτορες/ἐξκούβιτοι, "침대 밖에 있는 자들" 혹은 "보초들")는 황제 레온 1세가 제국군 내 게르만인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창설한 황실 친위대이다. 친위대 사령관은 곧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6세기에는 여러 황제들이 그들에 의해 옹립되었다. 엑스쿠비토레스는 7세기 말 이후 기록에서 자취를 감췄지만, 8세기 중반 정예 타그마 부대 중 하나로 재조직되었으며 정예 충격기병의 역할을 했다.

 초창기 그들의 지휘관은 엑스쿠비토레스의 백작(Comes Excubitorum)이었고, 6세기에는 실전 부대와 친위대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맡았다. 타그마 체제 아래에서는 엑스쿠비토레스의 도메스티코스(Domestikos ton Excubiton/Excubitoron)가 지휘관이 되어 친위대 임무를 버리고 표준적인 야전군 부대가 되었다. 그들은 상류층 출신의 직업군인으로, 당시 제국군이 동원할 수 있었던 기병 전력 가운데 최정예였다. 높은 훈련도와 사기, 제국의 부유함이 그대로 반영된 값비싼 장비를 통해 그들은 전장에서 황제의 힘을 대변했다. 부대 편제 중에는 scribones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아마 테마와 타그마 부대에서 의료 잡역부 역할을 했던 것 같다.

 9세기에서 11세기 사이의 엑스쿠비토레스는 황궁과 황족들을 보호하는 부대인 바실리키 이테리아의 일부가 되었다. 엑스쿠비토레스는 바실리키 이테리아의 최상위를 차지했다. 관리에게 '엑스쿠비토르'라는 칭호를 수여한다는 것은, 곧 그가 황제의 완전히 신뢰를 받는다는 뜻이었다. 바실리키 이테리아 내에서 타그마 식 이름인 엑스쿠비토르를 가진 자들은 황제의 신임받는 신하로써, 야전군 사령관, 원정 지휘관, 지방 영주들의 감찰관 같은 여러 중책을 맡았다.

 우리는 황제를 근접경호하는 병력을 가리켜 '엑스쿠비토레스'라는 이름을 설정했다. 왜냐하면 '바실리키 이테리아'에는 다른 소규모 의전용 부대들, 혹은 후대의 바랑기 친위대 같은 용병들까지 모두 포함되기 때문이다. 당대의 엑스쿠비토르 중 가장 유명한 자를 들자면 황제 바실리오스 2세의 명을 받아 이탈리아 재정복을 지휘했던 장군이자 카테파노, 바실리오스 보요안니스가 있다. 당대의 학자들에 따르면 그는 엑스쿠비토레스의 반지를 끼고 있었다.




타그마 톤 아리트무 / 누메리 (Tagma ton Arithmou / Noumeroi)

 타그마 톤 아리트무 혹은 타그마 티스 비글라스는 이리니 황후가 타그마 부대들이 자신의 권좌에 위협이 된다고 느끼고,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새로 창설한 부대다. 그리스어 '아리트모스'는 라틴어의 '누메론'과 완전히 같은 뜻(숫자)이지만, 이처럼 서로 비슷한 이름을 가진 두 개의 부대가 얼마 동안 공존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도 코디노스의 바실리키 신탁시스를 근거로 추정하자면, 아마 두 부대는 9세기 말 혹은 10세기 초 경에 하나로 합쳐진 것 같다. 그 시점에 누메리가 별도의 부대로 존재했다는 확실한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스도 코디노스는 바실리키 신탁시스 안에 있는 타그마 부대는 6개였음을 확실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10세기 경에는 같은 뜻을 가진 두 가지 이름이 하나의 타그마 부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추정했다.

 타그마 톤 아리트무는 테오도시오스 성벽을 지키는 두 보병 부대 가운데 하나였다. 사람 혼자서 지탱할 수 있는 갑옷의 무게에는 한계가 있다. 그 때문에 말과 갑옷 무게를 분담할 수 있는 다른 타그마 부대의 캐터프랙트 기병들과는 외양이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그들이 중무장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최고 수준의 라멜라나 미늘 흉갑, 가볍고 튼튼한 쇠사슬 갑옷 상의(hauberk)와 두건(coif), 강철이나 뼈로 만든 팔과 다리 보호대 등을 갖췄다. 이는 동시기 평균적인 테마 병력들에 비해 훨씬 중무장한 것이다. 이에 더해 그들은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 전투력을 갈고 닦았고, 당대의 다른 보병들에 비해 확실한 우위에 있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스쿠타티 중장보병 형태로 만들었고, '궁수'의 역할은 타그마 톤 티콘에게 완전히 넘겼다.



바실리키 이테리아 (메갈레 이테리아)


시포나토레스 (Siphonatores)

 사실 시포나토레스는 별개의 부대로 존재하지 않았다. 시포나토레스란 '히로시폰을 다루는 자들'이란 뜻으로, 히로시폰이란 곧 로마 전함들이 쓰던 '그리스의 불' 혹은 '액체 불'을 분사하는 장치를 개인화기 정도로 작게 만든 물건이다. 당대에 이 무기에 관한 정보는 극비였으므로, 오늘날 이 무기에 관해 알려진 정보도 거의 없다. 최근에 발견된 유물들, 그리고 스킬리체스 연대기에서 그와 비슷한 무기를 가진 병사가 공성탑에서 나와 성벽의 적군을 공격하는 모습을 그린 삽화 딱 하나만 있을 뿐이다.

 비교적 확실하게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은 황궁 직속의 병사였으며, 이 무기들은 황궁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황제의 확실한 신임을 받았으며, 아마도 그 신임 덕택에 그들이 사용한 무기에 관한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혀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근접 전투에서 이 무기가 적에 노획되지 않으려면 사용자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므로, 병사들 역시 상당히 중무장했을 것이다. 이들의 활용법 역시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며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적진에 공포를 확산시키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이 목표였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다.

 상상해 보라. 공성탑이 성벽에 접근한다. 성벽에 늘어선 수비대는 곧 그곳에서 뛰쳐나온 적군을 맞을 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막상 문이 열리자 다른 적병들은 모두 뒤에 있고, 이상한 물건을 든 병사 딱 하나만 앞에 서 있다. 그리고 그 이상한 물건에서 엄청난 화염이 뿜어져나오는 것이다! 사람이 횃불처럼 불타오르고, 수비병들의 대열은 완전히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러면 공성탑에서 대기하던 공격 병력은 그 틈을 파고들고, 이상한 물건을 가진 병사는 안전하게 뒤로 빠진다.

 이 무기는 적군에게도 치명적이지만, 풍향이 갑자기 바뀐다거나 하면 아군은 물론 사용자에게도 치명적일 수 있다. 이런 무기를 다루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훈련을 받아야만 한다. 갑옷과 장비 역시 최고급이어야 하며, 유사시에 대비해 금속으로 된 갑옷 위에 양모나 비단으로 된 로브를 덧입었을 것이다.




바랑기 친위대 1단계 - 바이킹 드루지나 용병 (최초 등장시)



바랑기 친위대 2단계 - 988년 이벤트 이후



바랑기 친위대 3단계 - 갑옷 업그레이드

 Var는 곧 '헌신의 말', 봉사의 맹세를 가리킨다. 홀름가르드(노브고로드)와 키예프에 정착한 루스인들이 로마인들에게 처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9세기 후반이다. 그 당시 루스인들은 케르손(크림 반도)과 아나톨리아 북부 지역을 대상으로 소규모 약탈 원정을 시작했다. 로마인들은 루스인들을 가리켜 "미지의 종족"이라고 불렀다. 로마의 연대기 기록자들이 지적하듯, 원래 그들은 하자르의 대 칸에게 복속되어 있었지만, 더 이상 그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된 칸은 로마 제국에게도 그 위협을 알렸다. 서기 901년과 907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대규모 습격이 있었고, 이후 "스웨덴의" 루스인들은 로마 제국과 합의점에 이를 수 있었다. 그 결과 루스인들은 로마 제국에서 교역을 하거나 용병으로 일할 수 있었다.

 루스인들은 하자르 제국의 몰락을 틈타 슬라브인 지역에 대한 확장을 시도했으며,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남쪽과 동쪽, 서쪽을 계속해서 공략했다. 바이킹 '약탈자'(vikingar)들은 이탈리아를 비롯한 여러 전선에서 동원되었지만, 특히 니키포로스 포카스의 크레타/칸닥스 아미르령에 대한 공격에서도 확인된다. 요안니스 치미스키스 황제가 불가리아를 공격하기 위해 도나우 북쪽에 사는 루스인들에게 원조를 요청했을 때, 루스인들은 로마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불가르인들을 무찌른 루스인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제국과 전면전을 시작했다. 반격에 나선 로마의 보병과 기병들은 루스인들의 방패벽을 쉽사리 뚫지 못했고, 간발의 차이로 겨우 이길 수 있었다. 요안니스 치미스키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욱 중무장한 캐터프랙트 기병(아타나티)을 동원했지만, 루스인들을 상대로 한 전투는 여전히 승부를 가리기 어려웠다.

 987년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1세가 케르손을 점령하자 '루스인들의 공포'가 부활했다. 블라디미르는 점령 지역을 반환하는 대가로 왕실 간 통혼을 요구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제 4전선을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여동생 안나를 시집보냈다. 블라디미르는 약속대로 케르손 지역을 제국에 반환했다. 바실리오스는 블라디미르와의 관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당시 그는 제위를 둘러싸고 이미 내전을 한 번 치른 경험이 있었고, 젊어서부터 황궁에서 '충성스러운' 호위병들의 호위 아래에서 여러 황제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블라디미르는 바실리오스의 요청에 따라 6천 명의 드루지나 전사들을 보냈고, 바실리오스는 곧바로 그들을 자신의 개인 경호병으로 삼았다!

 이 전사들은 흔히 알려진 역사적 신화와 달리 도끼만 쓰는 병사들은 아니었으며, 창병은 물론 여러 종류의 보병으로 활약했다. 물론 커다란 양손도끼와 양손검을 자주 쓴 것은 사실이었으며, 이는 로마인들이 보기에는 매우 이색적인 것이었다. 갑옷의 경우 초창기에는 자신들의 양식을 유지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전투가 잦아지면서 결국 제국 무기고의 갑옷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최고급의 강철 쇠사슬 갑옷과 강철 팔다리 보호대, 흉갑이 바이킹 양식의 투구, 방패와 조합되었다.

 현재 시점에서 바랑기 친위대는 대부분 키예프 출신의 스웨덴 루스인들로 구성되었다. 이후 앵글로색슨 허스칼, 데인 히르드, 여타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이 부대를 거쳐 가게 되는데, 특히 1066년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 쫓겨난 색슨 지배층들이 참여하면부터의 일이다. 이후 바랑기 친위대는 로마 제국의 전체 기간 동안 존재했던 황실 친위대 가운데 가장 충성스러운 집단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바랑기 친위대의 창설에서 한참 뒷세대인 안나 콤니니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들은 황제에 대한 엄청난 충성심을 가졌다. 황제를 지키는 것은 가문의 전통이자 비밀스러운 약속,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전수되는 유산이었다. 그들은 추호의 역심도 품지 않고 한결같은 충성심을 유지했다."



장비

 로마 제국이 군사 기술과 전략 전술에서 항상 최고를 유지한 비결은, 전장에서 싸운 적들로부터 모든 것을 배우고 변화시키는 능력이었다. 이 능력은 '이방인'의 것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그리스인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며, 로마인들은 이를 아득한 공화정 초기 시대부터 15세기에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갈고 닦았다!

 우리가 다룰 9세기 후반에서 11세기 후반 사이의 시대에 로마인들은 '고전 시대로의 회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여기서 회귀란, 갑옷 양식에 있어 오래 전 과거의 양식이 재등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같은 '회귀'는 장교들의 볏 달린 투구나 근육 모양을 본떠 만든 금속 흉갑 등에서 나타난다. 황제 레온 6세가 저술한 Leonis Imperatoris Tactica를 보면 이 고전기로의 회귀는 더욱 확실해진다. 황제는 저서에서 초기 (공화정) 시대의 진형과 부대명을 쓰는 것은 물론, 더 오래된 헬레니즘 시대의 진형, 장비, 부대명 등을 쓰기까지 한다.

 로마인들은 일반적으로 변화를 거부하는 매우 보수적인 사회이며, 그것이 그들의 -잠정적인- 멸망의 원인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중세 전반을 거쳐 로마 제국은 항상 적응을 통한 변화를 시도했고, 군대의 장비와 전술 역시 한시도 멈추지 않고 새롭고 독자적인 요소를 개발하면서 로마군이 항상 최고로 만들 수 있도록 만들었다. 로마군은 고트인, 사산조 페르시아, 아바르인, 아랍인, 마지막으로 노르만인과 서유럽의 군사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항상 최고의 효율을 발휘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가 다룰 시대의 경우, 로마 병사들은 몇 가지 고전기 양식의 장비를 제외한다면 여러 가지 동방 방식의 갑옷과 전술을 받아들였다. 주된 모방의 원천은 과거의 아바르와 당대의 아랍, 하자르 군대였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고전기의 카시스 투구를 완전히 대체한 원뿔형 투구들이다.

 타그마 부대의 병사들은 최고 수준의 무기를 사용했다. 최고의 무기를 만들기 위해 아랍 치하의 히스파니아 에서 강철을 수입했으며, 전 세계에서 최고의 무기 장인들을 초빙했다. 보병들의 장비는 테마 군 병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검의 경우 짧은 버전의 스파티온과 외날(초기 형태) 파라피리온 검이 가장 흔했다. 많은 사람들이 메이스와 망치(warhammer) 역시 보병 장비로 쓰였다고 주장하지만, 이 점은 확실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중세 그리스어에서 몽둥이/방망이와 곤봉은 모두 라드비온, 혹은 코레네라고 불렀다. 문제는 목제, 혹은 금속제 군용 메이스 역시 같은 단어로 불렸다는 것이다. 곤봉, 방망이, 몽둥이 따위는 '경찰' 혹은 군중 시위를 진압하는 병사들이 흔히 쓰는 장비였지만, 군대의 보병들이 메이스를 썼다는 증거는 전혀 찾을 수 없다. 메이스나 망치가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치는 가속이 필요하고, 이는 기병이 보병을 상대할 때 확보된다. 다만 보병들도 도끼나 망치를 쓰기는 했다. 이들은 치쿠리온(도끼), 아펠라타키온 혹은 스피라(망치)라고 불렸다. 반면 메이스는 코레네, 마추키온, 케팔로트라브스테스(머리통 깨는 물건)라고 불렸다. 바르두키온(혹은 스킵트론)이라고 불리는 물건도 있긴 했는데, 이는 오늘날로 치자면 장군의 지휘봉과 같은 것이었지 실제 무기는 아니었다.

 한편 로마 기병들은 검과 함께 메이스, 도끼, 망치 등을 자주 썼다. 기병들의 검은 스파티온이라고 불리는 스파타 형태의 장검으로, 현대 역사가들은 비잔틴 장검이라고 부른다. 망치는 동방, 즉 아바르나 하자르 같은 스텝 전사들 혹은 과거 사산조 페르시아로부터 전래한 것이다. 유럽에서 기사들이 출현하기 훨씬 전부터 로마군이 메이스를 사용한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메이스는 나무 손잡이 혹은 금속 손잡이에 여러 가지 모양의 머리(가시가 박힌 것, 날이 세워진 것 등)가 달린 형태로 발전했다. 스파티온은 과거 원수정 말기 스파타의 직계 후손이다.

 타그마 병사들은 테마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종류의 창을 사용했는데, 다만 '콘타리온 마크론'만큼은 사용했다는 언급이 없다. 아마 타그마 병사들에게는 그처럼 거대한 장창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타그마 보병들은 수도의 성벽을 지키는 공성전에서 주로 동원되었기 때문에 공성전 상황에서는 장창이 필요 없었을 것이고, 드물게 야전에 나서는 경우에도 높은 훈련도와 사기 덕택에 굳이 장창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로 그들의 장비는 대개 3미터 크기의 콘타리온으로 충분했다.

 방패는 병사의 방어구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방패 역시 테마 군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종류가 있었다. 정예부대 병사들은 10세기까지 타원형 방패를 주로 사용했지만, 9세기 말부터 이미 주류는 원형 방패였다. 곡선 형태는 기하학에서 완벽한 형태로 여겨졌으며, 큰 원형 방패들은 '스쿠타리아 텔리아'(완벽한 방패)라고 불렸다. 연/나뭇잎 모양 방패들은 아바르인들의 침입 직후에도 있었지만, 로마군이 이를 제대로 쓰기 시작한 것은 하자르인들의 득세 이후였다. 이 형태의 방패들은 10세기 초반부터 점차 확산되기 시작하여 11세기 말에는 방패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로마식 연/나뭇잎 모양 방패들은 1010년대부터 이탈리아를 침략하기 시작한 노르만인들의 방패보다는 작았다. 황궁 경비병들은 위신을 세우기 위해 원형 방패를 계속 사용했던 것 같다. 바랑기 친위대 병사들이 자신들의 원래 방패 양식을 버리고 큰 원형 방패를 쓰기 시작한 것을 보면 그 같은 추정이 가능하다.

 타그마 기병들 역시 모든 종류의 방패를 사용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작은(좀 지나치게 작아 보이는) 원형 방패로, 최근 화가들이 그린 '캐터프랙트' 그림에도 대부분 이 방패가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은 방패는 로마 기병들이 오래 전부터 사용했던 것이지만, 그 용도는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그 수수께끼란, 이 방패들은 화살이나 보병의 창을 막기에는 너무 작다는 것이다. 물론 캐터프랙트들은 갑옷을 3중으로 껴입었기 때문에 화살은 별로 걱정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방패는 무엇 때문에 들고 다녔단 말인가? 검토해 보자.

 첫째 : 소형 방패는 원래 사용자의 어깨와 목에 가까운 상완부에 매달았다. 그러나 우리 모드가 다룰 시대에서 방패는 사용자의 하완부로 내려왔다.
 둘째 : 작고 가벼운 특성 때문에 사용자는 방패를 바로 적의 공격 방향으로 돌려 막을 수 있다. 이제 그 "공격"의 특징을 확인할 차례다. 캐터프랙트에게 근접할 만한 적들은 칼, 도끼, 망치, 메이스를 사용할 수 있다. 칼날 정도는 나무, 뼈, 금속 등으로 만든팔 보호대(키로프셀라 혹은 마니켈리아)로 막아낼 수 있다. 하지만 메이스와 망치의 경우는 문제가 달라진다. 메이스로 얻어맞을 경우 그 충격 에너지는 갑옷 안까지 전달된다. 그 경우 겉의 갑옷은 멀쩡해도 속의 팔은 작살날지도 모른다! 고로 그 같은 충격을 외부에서 흡수함으로써 사용자의 팔뼈를 보호하기 위한 장비가 필요하게 된다. 망치 역시 마찬가지다. 즉 소형 방패는 사실 접근전에서 적의 공격을 정확하게 방어해 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투구 역시 다양한 형태가 있었다. 고전기 로마군이 사용하던 카시스 식 투구 혹은 모조품, 동방식 투구의 변형이 기본이 되었다. 원뿔 모양의 투구는 동방의 직접 혹은 간접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서기 1세기부터 쓰였던 가면 달린 투구는 아직도 쓰이고 있지만, 과거에 비하면 겉모습은 많이 단순해졌다. 사실 이 가면 달린 투구 역시 동방의 영향이다. 앞서 언급했듯 볏 달린 투구 역시 재등장했으며, 이는 고전기 로마 및 더욱 과거의 헬레니즘 시대의 전통으로 회귀하는 양식을 보여 준다. 근육 모양을 본떠 만든 흉갑과 헤라클레스의 매듭 역시 고대 로마/헬레니즘 시대의 유산이다. 헤라클레스의 매듭이란 교회의 프레스코화에 등장하는 군인 성자들이 가슴이나 허리에 두르고 있는 비단 띠를 가리킨다. 이 띠는 군대에서 사병과 장교를 구분하고 계급을 식별하기 위한 것이다. 투구로 돌아가서 반드시 지적하고 넘어갈 만한 점이 있다면, 10세기 중반 챙(visor) 달린 투구가 처음 등장했으며 11세기 후반까지 기존의 주류였던 동방 양식 투구들을 점차 대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갑옷의 경우 타그마 병사들을 가리키는 단어(카타프락티)가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 카타프락티란 머리부터 발끝까지 중무장한 자를 가리킨다. 물론 이 단어는 매우 포괄적으로 쓰였지만, 적어도 타그마 부대에 한정한다면 정확한 표현이었다. 머리부터 보자면, 병사들은 보온과 충격 흡수를 위해 강철 투구 아래에 누비 두건(coif)과 2중, 3중의 쇠사슬 두건을 덧입었다. 몸통 갑옷은 병사가 어떤 부대에 있느냐에 따라 달랐다. 말이 무게를 대신 감당해 주는 기병과 혼자 무게를 감당하는 보병의 갑옷이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보병들의 경우에도 경화된 가죽 갑옷을 기본으로, 그 위에 과거 근육 모양 흉갑의 형태를 본딴 미늘 혹은 라멜라 흉갑을 덧입었다. 이에 더해 프테리게스(몸통 갑옷 아래에 치마처럼 내려오는 장식 - 역주) 혹은 추가적인 사슬 갑옷(로리키아)이 추가되기도 했다. 흉갑은 클리바니아라고 불렸으며, 갑옷의 미늘은 금속 혹은 뼈로도 만들었다. 타그마 부대의 경우 연철보다 가볍고 단단한 강철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청동은 다루기 쉬운 금속이지만, 제국의 갑옷 제작자들은 그보다 훨씬 단단한 강철도 아무 문제 없이 다룰 수 있었다. 기병용 클리바니아와 로리키아는 보병용보다 더 길었는데, 말에 탄 상태에서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기병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모직(누비) 옷을 추가로 입었는데, 갑옷 아래 입을 경우 카바디온, 위에 입을 경우 에필로리키온이라고 했다. 특히 갑옷 위에 덧입을 경우 병사의 소속 부대나 개인 재산 상황에 따라 화려한 장식이 추가되었다.

 테마 군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타그마 병사들도 케두클론을 썼다. 그러나 그 로브의 용도는 갑옷의 금속제 소재들을 습기로부터 보호하는 것 뿐이지, 기습이나 위장 용도는 아니었다. 그와 반대로 로마인들은 이 병사들의 번쩍이는 갑옷과 무기들을 자신들의 막강한 군사력의 상징으로써 최대한 과시하려 했다.

 키로프셀라, 혹은 마니켈리아라고 불리는 팔 보호대는 앞서 설명한 바 있다. 그것과 비슷하게 뼈, 금속, 나무 등으로 만든 다리 보호대인 포도프셀라 혹은 칼코투바를 장비하면 병사의 방어구가 완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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